단편 영화를 전문으로 기획, 제작, 배급하는 퍼니콘과 언더식스티에서 선보인 <숏버스 기묘행>(2021)은 2021년 7월부터 12월까지, ‘이별행’을 시작으로 ‘배우행’에 이르기까지 총 스물여섯 편의 단편 영화들을 주제나 장르별로 구분해 옴니버스 구성으로 매달 개봉해 온 프로젝트다. ‘숏버스(Short-bus)’는 말 그대로 특정한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는 버스를 지칭한다. 그중 <숏버스 기묘행>에 대해 쓴다. ‘에케호모, 이 사람을 보라’부터 ‘세이브 미’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환경과 의도로 만들어진 다섯 편의 단편은 우연하게도 ‘기묘’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장르적 외피는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가깝지만, 내게는 넓은 의미에서 판타지로 다가온다.
“환상 작가들은, 신화와 전설이라는 고대의 원형을 인용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보다 젊은 과학과 기술의 원형을 끌어들이는 사람이든, 사회학자들만큼이나 진지하고 어쩌면 훨씬 직설적으로,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인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들이 입에 담았고 모든 아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통찰력과 연민과 희망을 얻는 데 상상력만큼 적합한 도구는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어슐러 K. 르 귄, 『밤의 언어』에서
<숏버스 기묘행>에 실린 다섯 단편은 모두 이 세계에 있을 수 없거나, 앞으로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없거나 한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장편과는 다른 단편의 특성을 활용하여 특정한 주제 의식을 담아낸다. 정도의 차이, 성취의 차이는 있으나 이 세계는 지나올 만한 가치가 있다. 기술의 양면적 속성을 담아낸 단편(‘에케호모, 이 사람을 보라’, ‘조안’)에서부터 성찰과 풍자를 담아낸 단편(‘분실물’, ‘포 세일’),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단편(‘세이브 미’)에 이르기까지. ‘기묘하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기이하고 묘하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된다. ‘내가 뭘 본 거지?’, ‘이게 정말 영화이기만 할까?’ 그 이상한 기분이 나쁜 쪽이라면 우리는 그걸 잊고 싶어하겠지만, 좋은 쪽이라면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세계로 자리한다.
'에케호모, 이 사람을 보라' - 볼 수 있는 것들의 범람 속에서
<에케호모, 이 사람을 보라>의 ‘에케호모’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로마의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예수를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다. ‘BJ보이지’의 관찰과 관음 대상이 되는 여성의 손에 난 상처, 장엄하게 깔리는 배경음악 등은 다분히 종교적 상징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영화가 의도했으리라 짐작되는 바는 불특정 다수의 집단이 향할 수 있는 무분별한 폭력성 쪽에 있을까. 영화 초반 관객은 프레임 안에서 활보하는 여성이 누군가의 관찰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하다는 정보가 관객에게도 전해지는 순간, 영화의 촬영 방식도 조금씩 변화한다. 시각적 소비 대상으로만 피사체를 취급하지는 않겠다는 듯 여러 방향과 높이에서 시선을 구성한다. 그렇지만 장편에 비해 단편이 태생적으로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상징적 요소들을 고려하더라도, <에케호모, 이 사람을 보라>는 <숏버스 기묘행> 옴니버스 다섯 작품 중에서는 의미 혹은 메시지의 과잉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관찰의 대상이 되는 ‘BJ보이지’를 연기한 이정현 배우의 캐릭터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어쩌면 미술, 편집 등 프로덕션 전반을 통제권 안에 두려 했던 감독의 약간의 욕심이었으리라고 헤아려본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현대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거의 모두가 타인의 정보를 관찰할 수 있고 자신도 그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자체는 새롭지 않지만 유효하다.
'조안' - 디지털 디톡스는 가능한 것입니까
노트북 화면과 같은 ‘풋티지’ 영상이 영화에 본격적으로 쓰인 건 2010년대 초중반부터의 일이다. 우리에게는 국내에서도 크게 성공한 장편 <서치>(2018)로 익숙하게 각인되지만 유정수, 김지산 감독의 <조안>은 그 이전부터 시나리오가 쓰였다.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그로 인해 바깥세상과 ‘나’의 교류의 매개체가 되는 스마트폰을 주 소재로, <조안>은 바로 그 스마트폰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안면이나 지문 등을 통해 잠금해제를 하고 나면 전자기기는 나에 대해 어쩌면 스스로 기억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매 순간 알고 있는 존재가 된다. 사진, 방문 장소, 기록 등의 정보들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민감하고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다. 표면적으로는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에서 만난 사람이 내가 언급하지 않은 정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주인공 ‘한결/조안’(주인영)의 상황을 다루지만 <조안>이 향하는 바는 결국 ‘나’와 기술 간의 관계성이다. 우리는 기술, 특히 디지털 기술과 전자기기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기술은 많은 편의와 유익을 제공한다. 아니, 대부분의 것들은 일상의 사소한 불편을 해소하거나 혹은 세상에 특정한 기여를 하기 위해 발명된다. 그걸 활용하는 사람의 의도나 판단에 따라 이는 얼마든지 양면적 속성을 지닐 수 있다. 같은 기술이어도 당대의 윤리적 판단 기준과 사회적 합의에 따라 그 용도는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있다. <조안>은 얼핏 서늘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 보이지만 두 연출자는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으려 한 작품은 아니라고 말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미러]의 한 에피소드로 들어가도 손색없을 만큼의 착상이 돋보인다. 많은 화두가 집약돼 있는 동시에, 감각적으로 정돈된 영상 연출이 주는 정보들을 편히 소화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작품이다.
'분실물' - 진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신철규, '유빙' 부분,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우리의 시간은 흐른다. 영화라는 물리 매체는 그 자체로 시간의 이런 속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혹은 원형적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영화의 시도는 그래서 사람의 욕망과 맞닿는다. 누구에게나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회를 남긴 결정이,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감정의 회한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고 그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의 순행을 거스르길 시도하는 영화들의 종착지에는 언제나 절반의 체념과 탄식이 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자각. <분실물>의 주인공은 종이 울리자 1년 전 그날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1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는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과 분투하며 과정과 결과를 바꿔보려 하지만 종은 다시 울리고, 그는 현재로 돌아와야만 한다. 앞서 이 타임슬립의 종착에는 체념과 탄식이 절반 있다고 했다. 나머지 절반은 현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우리는 왜 매번 실패하고 실수하고 잘못하기만 할까.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에 어쩌면 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지 모르겠다. 깨진 조각을 맞추고 헤진 소매를 기워내고 상처를 봉합하기 위한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분실물 센터에서 일하는 <분실물> 속 주인공이 진정 잃어버린 건 물건도 사람도 아니고 지나간 시간 자체다. 어떤 분실물은 누구도 되찾을 수 없고 남아 있는 나날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다 매번 다른 비슷한 무언가로, 조금씩 대체해나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포 세일' - 나 또한 이 사회의 재화일 수 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남자는 밤길을 걷던 중 어떤 것에 이끌려 한 자판기 앞에 선다. 젊은 서양 여성의 얼굴과 따뜻한 커피의 가치를 담아낸 광고 이미지 앞에서, 그는 500원 동전을 넣고 300원짜리 커피를 뽑는다. 거스름돈은 200원, 그런데 반환되는 동전은 100원짜리 두 개가 아닌 500원짜리 두 개다. 몇 걸음을 걷다 그걸 발견한 남자는 걸음을 되돌려 커피 한 잔을 더 뽑는다. 계속해서 100원 동전이 아닌 500원 동전만을 뱉어내는 자판기. 남자가 돌려받는 금액은 몇 천 원에서 시작해 이내 몇 만 원이 되며, 그는 손바닥으로 모자라 급기야 비닐봉지를 꺼내 자판기 반환구가 토해내는 동전을 쓸어 담으려 한다. 500원을 넣고 200원을 거스름돈으로 받으면 그건 100x2x5=1,000원이 되니, '만약 50,000원을 넣고 거스름돈을 받으면 그건 49,800x2x500=498,000원이 되겠지?'라는 계산. 영화 <포 세일>의 남자가 아니어도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 유혹에 빠질 것이다. 내려갈 수 있는 최대한의 밑바닥에 몰린 남자에게도 이익을 얻고 자본주의 질서에 복무하고자 하는 어떤 욕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분실물>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모던 타임즈>(1929) 속 유명한 톱니바퀴 속 남자의 모습처럼) 영화 제목이 지칭하는 바와 맞물린다. 한 마디의 대사 없이도 주제를 전달하는 데에 지장이 없는 <포 세일>의 결과물은 초기 무성영화 같은 결을 지닌다.
'세이브 미' - 잘 죽는다는 것, 잘 산다는 것
요양병원에서 거의 연명하다시피 누워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하는 주인공의 일과 후 시간은 몽롱하게 술에 취해 있는 것으로 채워진다. 어떤 시간에는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 (빗으로 머리를 ‘올빽’으로 만든다든지 하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 그는 술을 마신 뒤 잠에서 깨면 ‘빨간 매니큐어 발라줘’ 같은 메시지가 자신의 몸 곳곳에 적혀 있는 걸 발견한다. 그가 관리하는 병동에는 여섯 명의 환자가 있는데, 이 메시지는 점차 ‘나 좀 죽여줘’ 같은 내용으로 향한다. 전윤수 감독의 <세이브 미>는 기발한 설정과 많은 이들에게 유효할 주제 의식을 어렵지 않은 화법과 정제된 영상 안에 담아낸다. 주인공이 돌보는 환자들은 자녀가 찾아와 부동산 증여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 가운데 기저귀를 가는 모습과 같이 죽음의 경계에서 삶이 내보일 수 없는 날것의 서늘한 모습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주인공 ‘장수’가 어떤 선택을 내리고 난 뒤, 밝은 톤의 클래식 사운드트랙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세이브 미>가 향하는 시선은 비장하면서도 큰 질문을 던진다. 존엄하게 죽는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영화 중반에는 병에 걸린 아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라며 생명 유지 장치의 중지를 서약했던 주인공 ‘장수’의 전사가 겹쳐진다. ‘나 좀 죽여줘’라는 말이 어떻게 ‘나 좀 구해줘’와 같은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세이브 미>의 이야기는 더욱 명확해진다.
영화 '숏버스 기묘행' 포스터 <숏버스 기묘행>(Shortbus: Mysterious Reality, 2021)
2021년 9월 30일 개봉, 66분, 15세 이상 관람가.
<에케호모, 이 사람을 보라> 12’26”
감독: 현명우
출연: 이정현, 안태주
<조안> 08’00”
감독: 유정수, 김지산
출연: 주인영, 김종윤
<분실물> 15’50”
감독: 오현도
출연: 이형석, 이예정, 김그림
<포 세일> 12’02”
감독: 이용섭
출연: 김송일
<세이브 미> 17’33”
감독: 전윤수
출연: 김인수 등
제작/배급 | 언더식스티, ㈜퍼니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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