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 취향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그러니까 좋아할 확률이 높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범주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산문이다. 생각해 보니 진작부터 여기에는 '영화감독이 쓴 산문'도 포함되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니시카와 미와, 변영주 등의 이름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 목록에 추가하게 될 윤가은 감독님의 산문. 넓게는 말 시리즈나 감독 시리즈도 상당수 있으니, 내게 어떤 출판사의 책이 일상에 깊이 닿아 있느냐 물으면 마음산책의 도서들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고. 2019년에 시작한 마음산책북클럽(2기)을 올해에도 재가입했다. 북클럽 첫 책이 필모그래피 모든 작품을 다 좋아하고 추천하는 윤가은 감독님 책이라니 이것이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확실한 내적 복지 충족이 아닐는지.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만들면서 힘차게 살아야겠다. 좋아하는 마음을 더 자주 더 크게 느끼면서 즐겁게 걸어가야겠다."(202쪽)
2월 5일에, 책을 받았다.
2월 17일, 마음산책 '마음폴짝홀'에서
제대로 쉴 여유 없이 이런저런 것들에 쫓기고 할 일을 해치우느라 얼마간 활력이 다소 부족했던 게 사실이었는데 이런 하루라면 그래도 충전이 된다고 여긴 저녁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생겨나는 특유의 긴장감과 떨림이 있다. 나만 좋아하면 어떡하지, 일 수도 있고 그것에 관해서라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무엇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기분이 될 때도 있다. 한껏 떠들고 나서는 돌아서며 "이제 막 이야기를 시작한 기분"(199쪽)인데, 싶은 때도 있겠고. 그 모든 좋아하는 마음들을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글에서 고스란히 말하고 있을 때, "제가 사실 이런 걸 좋아하는데요"라며 주섬주섬 애정 하는 것들을 꺼내 보이는 이야기에서 일정한 동질감을 경험하게 된다.
2월 17일, 마음산책 '마음폴짝홀'에서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눈이 크게 떠지고 세상이 활짝 열리는 놀라운 기적"(11쪽)
⠀
이것은 현재적 의미로만 남지는 않는다. 가령 단편 <콩나물>(2013)은 <우리들>(2016)이 있은 후에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고 <우리들>과 <우리집>(2019)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를 여러 번 오래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깨닫게 되는 것처럼, 어떤 취향을 갖는 마음도 그것을 계속해서 갈고닦는 일이 특별하고 견고한 이야기를 만드는 듯하다. 이렇게 말하자니 어떤 것을 좋아하는 일에는 그와 다른 것을 좋아하는 일과 대단히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만 "너는 웬만하면 다 진심으로 좋아하잖아.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고. 어떤 건 그냥 좋아하고, 다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8쪽)라는 게 열렬한 덕질을 해본 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마음이다. 영화 글을 몇 년 동안 쓰고 있자니 마치 확고한 (감독이나 장르 등) 영화 취향이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해왔는데, 이 사람도 이래서 좋고 저 사람도 저래서 좋은 게 내게는 분명한 사실이어서.
⠀
북토크를 마친 후에 마음산책 대표님과 잠시 이야길 하다 곧 나오게 될 신간 소식을 조금 들었다. 아니 세상에.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그 이름만으로 '내 인생의 책'이 될 법한 소식이었다. 자리에 앉아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만히 좋아하다 보면 그것으로도 마치 세상이 예고 없이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니 불호보다는 호가 많은 쪽이 조금 더 좋지 않나 싶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확고하게 지켜낼 응원을 얻은 마음으로 마음산책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2022.02.17.)
책 『호호호』 그리고 필진으로 참여한 독립잡지 『index』 <우리들> 호에 각각 사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