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Saul Leiter Through the Blurry Window)와 사담
1. 어떤 버스 너머로 지나는 행인의 구두 한쪽, 자동차에 비친 도시의 건물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눈과 그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코트 입은 여인, 오래된 간판들. 혹은 그저 파란불이 켜진 신호등. 사울 레이터의 많은 사진들에는 제목이 없다. 그의 사진은 정확한 상품의 정보나 모델의 모습을 부각해야 하는 상업 잡지 사진에서도 여전히 그의 사진이다. 난반사되는 유리창, 모델을 반쯤 가린 우산, 조각난 거울들.
비비안 마이어라든지 안셀 애덤스 같은 몇 개의 이름을 제외하면 사진 예술에 대해 별 달리 아는 바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전시 내내 마치 (전시장의 오리지널 스코어 대신) 카터 버웰의 영화 <캐롤>(2015) 오리지널 스코어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테레즈와 캐롤의 표정들과 둘 사이와 주위의 풍경, 계절들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산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윌북, 2021)에는 "나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때를 좋아한다. 우리가 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모를 때, 갑자기 우리는 보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좋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런 사울 레이터 사진의 의도를 반영한 덕분인지, 오늘의 피크닉에서는 조명의 위치나 (전시를 보는 사람 스스로가 비치는) 유리벽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창문 너머 혹은 안개나 눈 비 너머의, 또렷하지 않고 주목하기 쉽지 않은 우연성과 평범성으로 가득 찬 이미지들이 어떤 시선을 거치는 순간 선구적이고 사려 깊은 작품이 되어 있기도 한다. 몇십 년 전의 사진들이 그 특유의 신호등, 노란 택시, 분주한 행인들, 오늘날에도 거기 있는 랜드마크들과 이제는 과거의 레거시가 된 인물들을 생생하게 현재에 와 되살려낸다. 정작 사울 레이터 본인은 세상에서 잊히기를 바랐다("Hoped to be forgotten")고 하지만 한 사람의 삶과 그것이 남긴 것들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이 되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조금 덜 무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2. 가려던 날보다 일주일을 미룬 건데, 오전 10시 첫 타임을 예약해놓고도 아침 7시 무렵부터 또 미룰까 고민을 했었다. 간밤에 비가 많이 와서였고, 사소하게도 '오늘 입어야지' 생각했던 옷을 입을 만한 날씨가 아니었어서다. 누가 보기에는 꽉 짜인 계획 속에 일상을 빈틈없이 보내는 것처럼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왠지 출근을 하기 싫어져서' 반연차를 쓴 적도 있다. 당일에 취소할 수 없지만 그래도 네이버페이 포인트로 예매한 건데. 그런 식으로 오늘의 전시도 보러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내심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가 안 올 때 입기 적당한 복장에 평소보다 가방도 조금 무겁게 하고 나섰다. 오후에는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와 "20대에 만났었는데 30대에 보게 되네" 같은 이야길 했고 간 적 없는 카페에 갔다. 좋은 전시 하나를 관람했다고 해서 오늘 하루에 대단한 의미를 둘 필요도 없겠다. 내일을 단지 출근을 하겠고 어떤 날은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하기도 할 테고 또 어떤 날은 몇 년 전 하루를 그리워도 할 거다. 뉴욕이든 제주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느라 몇 해를 보냈다. 어쩌면 별로 대단하지 않은 하루들이 지나고 보면 꼭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흑백이든 컬러든 지극한 일상을 되새기게 한 사진들 덕분에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2022.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