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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8. 2022

삶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수학자의 태도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 리뷰

*본 글은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3월 9일 개봉을 앞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의 예고편을 처음 보면서 떠오른 건, 허진호 감독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속 ‘장영실’(최민식)의 모습이었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던 그로부터 기억에 주로 각인된 건 작중 ‘세종’(한석규)과의 관계도 물론이지만 하늘 위 별을 올려다보며 그가 내내 꾸었던 어떤 순수한 꿈이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도 ‘이학성’(최민식)은 수학이라는 학문을 더 자유롭게 연구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남한에 내려왔으나 정체를 숨긴 채 일상을 보내는 인물이다. 최민식 외에 김동휘, 박병은, 박해준, 조윤서 등의 협연이 돋보이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시사회에서 조금 일찍 만났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최민식이라는 이름의 깊이


최민식의 필모그래피에서 관객들에게 주로 강렬하게 각인된 건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2010), 박훈정의 <신세계>(2013), 아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 같은 작품들에서의 굵직한 연기일 것이다. (혹은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또한 포함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 경우 좀 더 선호하는 쪽은 상술한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포함해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이나 <파이란>(2001) 같은 드라마 쪽이다. 규모도 장르도 관객 수도 다른 수십 편의 작품을 거쳐 그는 대사를 발화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저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내내 영화의 얼굴이자 메시지가 되는 엄숙하고도 진실한 배우가 되었다(고 느낀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도 중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사연이 밝혀지지만 처음에는 비밀스러움을 잃지 않아야 하는 ‘이학성’이라는 캐릭터에 그가 아닌 다른 캐스팅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탈북 수학자’와 ‘자사고 수포자’ 캐릭터 설정의 조화


한국의 상업영화에서 소재이자 배경으로서 북한을 빼놓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강철비>, 혹은 <공작>이나 <백두산> 같은 숱한 작품들이 있지만 전쟁영화로서든 혹은 정치 갈등을 조명하는 것으로서든 정치와 이념을 빼놓고 영화에서 북한을 다루는 경우를 찾기 어려운데 어쩌면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이상)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도 후반부에 이르러 ‘이학성’이 탈북하게 되었던 계기와 그에 관련된 어떤 사건이 다뤄지기는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그의 출신은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동훈고등학교에서 다른 인물들과 구분되는 ‘이방인’과도 같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에 더 큰 역할이 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이방인이란 단어를 언급했으니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건 비교적 신예 배우인 김동휘가 연기한 ‘한지우’다. 상위권 학생들만 들어간다는 자사고에 다니지만 최하위권 성적을 바라보고 있고 특히 수학 성적이 좋지 않아 담임으로부터 ‘차라리 내신을 더 잘 받을 수 있는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건 어떻겠냐는 말을 듣기도 하는. 영화에 자주 언급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사배자’(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의 줄임말)인데, 마치 근래의 작품들 특히 학원물에서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학생이나 기초 생활 수급자 가정의 학생들이 교내에서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의해 타의적으로 계층화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도 ‘한지우’는 겉도는 인물로 다가온다. 영화의 초반은 기숙사에 사는 ‘지우’와 교내 경비 일을 하는 ‘학성’이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수학을 매개로 서로 조금씩 관계를 터놓게 되는 과정들을 다룬다.



"틀린 질문에서는 옳은 답을 얻을 수 없다"


위와 같은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발화되듯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상업 영화의 틀 안에서 비교적 명확하고도 친절한 메시지를 주입하지 않는 화법으로 담아낸다. ‘지우’에게 ‘과학관 B103’에서 밤마다 수학을 가르치는 ‘학성’은 자주 “성적에는 관심 없다”라는 말을 한다. 그의 지론은 이렇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단지 공식만 외워서 그에 문제를 끼워 맞추는 것으론 한계가 있다. 문제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고민해야 하고, 사랑을 하듯 문제와 숫자를 가까이 두고 살펴야 한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이런 장면이 있다. 대뜸 칠판에 직각 이등변 삼각형을 그리는 ‘학성’. 높이는 ‘6’이고 밑변의 길이는 ‘10’이다. 이때 넓이는? 넓이를 구하는 공식에 의해(6*10/2) ‘지우’는 30을 답하고 ‘학성’은 이것이 틀렸음을 지적한다. 틀린 이유는? 문제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직각 이등변 삼각형이므로 밑변의 길이가 10이라면 이 삼각형의 높이는 6이 될 수 없고 당연히 5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학성’은 이 삼각형의 밑변이 지름이 되는 원을 그려 보여준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반지름이 존재하는 원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출제자가 문제를 잘못 낸’ 것이라 하여 출제자를 탓할 것인가, 아니면 30이라는 답을 내놓기 전에 사고의 과정을 통해 이것을 지적해낼 것인가.


수업 시간에도 비슷한 화두가 있다. 마침 ‘지우’의 담임교사 ‘김근호’(박병은)도 수학을 담당하는데, 한 문제의 풀이를 두고 ‘지우’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이의(‘n’의 값이 자연수인지의 여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를 제기하자 ‘근호’는 그건 출제자의 의도가 아니라며 틀렸다고 반박한다. 만약 수능과 같은 실전에서 한 문제에 대해 이를 계속 고민하는 순간 나머지 문제를 풀 수 있는 시간은 지나가버린다. 정해진 풀이를 외워 기계적으로 푼 사람이 문제 하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숙고한 사람보다 점수 자체는 잘 나올 것이겠지만, 인생이 시험으로만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겠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수학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과 화법은 이처럼 수험생이 아니어도 고민해볼 만한 삶의 태도에 관한 질문이다. 정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학성’의 수학 강의는 “너의 살아온 삶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봐”라고 말해주는 쪽에 가깝다. 겨울을 지나 봄의 문턱에서, 어떤 이들에게 이 말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상업 영화의 완급 조절과 대중적 화법


‘한지우’의 단짝인 ‘박보람’(조윤서)과 같은 조연 캐릭터를 활용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자칫 엄숙하거나 진지해질 수 있는 영화의 주제를 담백하거나 유머가 있는 쪽으로 돌려놓는다. 기숙사 생활 경험자라면 공감할 만한 야식 반입에서부터 시작해 ‘학성’이 좋아하는 딸기우유에 관한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117분이라는 알맞은 상영시간 안에서 극의 활력을 준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출신이 다르거나 주류에서 소외될 수 있는 캐릭터를 두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듯한 시선을 견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소재나 배경(탈북, 사배자, 입시 등)들은 그리 깊이 있게 다뤄지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별출연에 가깝지만 ‘지우’의 엄마 역을 연기한 강말금 배우의 출연도 반갑다.


또한 원주율을 악보 삼아(1=도, 2=레, 3=미, …) 만들어진 ‘파이 송’을 비롯해 바흐의 첼로 연주곡과 같은 음악 활용도 영화의 흐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가령 B103에서 ‘학성’과 ‘보람’이 함께 파이 송을 연주하고 곁에서 ‘지우’가 이를 바라보는 장면. 수학이 음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대목은 단지 정해진 답을 끼워 넣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수학이 일상에 어쩌면 가까이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사람들이 수학이 단순하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건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존 폰 노이만(1903-1957)


수학자는 자신이 세운 가설에 대하여 Q.E.D.(증명 완료)를 쓰기 전까지 수십 번의 고민과 검토를 거쳐 검증과 검증을 되풀이한다. 어떤 가설은 수십 년, 아니 백 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증명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쓸모나 수단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남들이 인정해주는) 좋은 대학을 가고 (남들이 인정해주는) 좋은 직장에 입사하는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건 삶의 지극히 일부만을 대변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입시가 갖는 무게감과 사교육 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상기한다면 마냥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고 낙관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수록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같은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지지하고 싶게 된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시련이나 예기치 못한 시행착오 앞에서, 어떤 이야기는 “당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다”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연필을 깎고 또 깎으며 수십 장의 노트를 쓰고, 분필 먼지를 켜켜이 마셔 가며 판서한 것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잠 못 이루고 있을 오늘 혹은 어느 날의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그러한 수학자의 태도라면 적어도 다른 누군가가 삶의 공식을 대신 끼워 맞춰 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메인 포스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 박동훈 감독

2022년 3월 9일 개봉,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최민식, 김동휘, 박병은, 박해준, 조윤서 등.


제공/배급: (주)쇼박스


*본 글은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스틸컷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시사회에서 (2022.02.24. CGV용산아이파크몰)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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