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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14. 2022

상실과 슬픔을 들여다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인생작

영화 ‘피그’(2021) 리뷰

*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이 냄새를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 말했다. “퍽퍽한 빵이지만, 맛깔난다오.” 그들은 빵냄새를 맡았고, 그는 맛보라고 권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대성당』(문학동네, 2014)

요리에는 취미로도 소질로도 거리가 멀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음식에 관해서라면 레이먼드 카버의 위 대목을 떠올린다. 원제가 ‘A Small Good Thing’인 위 단편에서 빵집의 주인은 아이를 잃은 손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빵을 내어온다.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빵집에 들어선 부부는 저 사소한 맛을 꽤 오래 기억할 것이다.


영화 '피그' 스틸컷


“난 내가 직접 요리를 준비한 모든 시간들을 기억해요”


영화 <피그>(2021)는 요리사를 주인공으로, 재료를 다듬고 손질해 정성을 담은 요리를 내어오는 일과 한껏 차려진 음식과 와인을 음미하는 일을 소재로,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혹은 도망쳐) 은둔하던 이가 자신과 타인의 내면을 진정 새롭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관찰한다. 유명한 셰프이자 직원들이 존경하고 선망하는 인물로 살던 ‘롭’은 더 이상 아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시를 떠난 지 15년째였다. 오두막에 살며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트러플을 채취하는 은둔의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돼지가 사라지고 ‘롭’은 자기가 떠나왔던 포틀랜드에 다시 발을 들여놓아야만 한다. 단지 돼지를 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떠나왔고 외면했던 가장 아픈 순간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피그>가 다루는 것은 ‘롭’의 상실만이 아니다. ‘롭’이 요리해주던 순간들로 대체로 불행한 일상들 속 작은 행복을 찾곤 했던 부부와 아이가 있었다. 한때 ‘롭’의 레스토랑에서 보조 셰프로 일하며 자기만의 펍을 운영하길 꿈꿨으나 대중의 입맛과 최신 동향에 맞춘 파인 다이닝을 하는 이의 고백을 지나, 성공한 요식 사업가이지만 가족은 물론 스스로의 마음도 돌보지 않은 채 껍데기만을 유지해오던 이의 문을 두드리며 ‘롭’은 자기가 떠나왔던 시절에 당도한다. 쉽사리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 누군가에게 선물해주었던 그 시간은 ‘롭’ 자신에게도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진정한 것들이었다.


영화 '피그' 국내 포스터

“만약 내가 그를 찾으러 나서지 않았다면,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을 거야.”


<피그>의 세 개의 파트는 모두 ‘시골식 버섯 타르트’,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 ‘새 한 마리, 술 한 병 그리고 소금 바게트’와 같이 요리들로 명명돼 있다. 거기에는 모두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추억이 깃들고 과거를 털어놓으며 내보이는 진실한 감정들이 스민다. 마치 좋은 재료가 있다고 해서 요리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상태 - 상실감을 극복한 것을 ‘어떤 상태’로 부를 수 있다면 - 는 저절로 당도되는 게 아니라 용기를 내고 상처를 입으며 대화를 시도하는 순간들로부터 탄생한다.


영화에서 주로 쓰이는 프레임은 벽이나 문을 양쪽에 두고 인물(들)이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구도다. 외면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갇히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피그>를 연출하고 각본을 쓴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코멘터리 중에 “우리는 상실감과 슬픔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익숙해질 충분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배려가 필요하다”라는 언급이 있다. 트러플 채집꾼들이 총을 들고 트러플 채집에 필요한 돼지와 개들을 밤낮없이 지킨다는 이야기에서 착안해 그는 유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이 무너질 만큼의 상실 그 후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인물의 내면을 가만히, 섬세하게, 생생하게 조명하고 그것을 관객에게도 능히 전달해내는 <피그>의 연출과 각본은 전미비평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하고 미국감독조합상 신인상 후보에 오른 마이클 사노스키라는 이름을 한 번 더 기억하게 만든다.



영화 '피그' 국내 포스터

<피그>(Pig, 2021),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

2022년 2월 23일 (국내) 개봉, 92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알렉스 울프, 아담 아킨, 다리우스 피어스, 데이비드 넬 등.


수입/배급: 판씨네마(주)


영화 '피그' 스틸컷


* 별 수 없이 여기에는 ‘롭’을 연기한 니콜라스 케이지의 스크린 밖 삶이 겹쳐 자리한다. “‘롭’을 연기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이나 경험을 모두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라는 그의 말은 진심으로 다가온다. 긴 슬럼프를 지나 조금씩 재기의 발판을 마련 중인 듯했던 그에게도 <피그>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인다. 만약 관객에게 <피그> 속 ‘롭’의 캐릭터가 생생히 와닿는다면 그건 온전히 배우의 힘이다.


* <피그>는 마이클 사노스키의 장편 감독 데뷔작이다. 그의 차기작은 <콰이어트 플레이스> 3편이다.


영화 '피그' 스틸컷


* 글은 판씨네마(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아주관적인 내용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인스타그램@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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