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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5. 2022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에서 질서를 찾고자 분투하는 일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1)를 읽고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지인 옮김, 곰출판, 2021, 263쪽


이수역 근처 '책그리고' 카페에서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논픽션과 에세이, 전기, 혹은 서평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책. 혼돈과 무질서함 속에서 확고한 신념에 따라 자연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세계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사람에 대한, 저자의 탐구와 그로부터의 저자 자신의 고백적인 이야기가 담겼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부터 시작해 자신이 얻어낸 예상과는 많이 달랐던 몇 가지 교훈 혹은 발견에 이르기까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상을 향한 기자로서의 집요함을 한껏 엿볼 수 있게 짜여 있다.



그러나 ‘어류’라는 분류에 관해서 제기되는 책 후반부의 서술은 일면 주제의 비약 혹은 저자의 사적인 의미 부여로 다가오는 측면도 적지 않다. 우리가 알고 믿어온 것이 불변의 진리이기만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제시하지만, “어류가 조류나 포유류 등과 달리 하나의 분기군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측계통군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점이 사람의 직관(예: 인간은 생후 4개월째부터 이미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기 시작한다고 한다)을 틀린 것 혹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으로 전부 취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분량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몇 계단을 건너뛴 것 같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267쪽) 과정이 비교적 충실하게 짜인 것과 달리 오히려 이론적 치밀함에는 이르지 못하는 듯 읽힌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목차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95쪽)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235쪽)


수많은 주제와 소재들이 (책 초반에 제시된 혼돈이라는 키워드를 반영하듯) 뒤얽힌 구성이 치밀한 직조물로 읽힐지 많은 것을 엮으려 한 욕심의 결과물로 읽힐지는 각자에 달려 있겠지만, 한편으로 또 하나 걸리는 대목은 책의 거의 전 부분에 있어서 수식과 수사, 비유 등이 경우에 따라서는 과잉으로 읽힐 만큼 난무한다는 점이었다. 가령 어떤 인물의 죽음에 대한 서술은 저자가 그 인물에 대해 후반부 깨닫는 어떤 진실과 그로부터 받았을 인상과는 유리된 듯한데 이건 내 느낌대로 적자면 활자가 적힌 종이책을 읽고 있는데도 문자를 읽는 게 아니라 전기수가 읽어주는 책을 듣는 듯한 경험이라고 해야겠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을 만나는 ‘독서경험’은 충분히 흥미롭거나 신선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야기 자체가 깊은 인상에 남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만약 룰루 밀러가 다음 책을 쓴다면 거기에 흥미를 둘 여지는 있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한 대목

(*여담: 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원천 차단하고 읽어야 할 만큼 스포일러 얼럿이 붙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강의 정보(예: ‘분기학’은 무엇인고 ‘분류학’은 무엇인지 등)는 알고 읽는 것도 좋다고 느낀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의 예고편을 보는 일과 마찬가지인데, 예고편은 특성상 당연하게도 작품 전반에 걸쳐 여러 장면들을 짧게 편집해 이야기의 큰 얼개나 느낌을 전달하고, 특정한 컷에 담긴 정보는 그 작품을 직접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맥락들로 차 있다. 영화를 직접 보기 전에는 그것이 참고할 정보임을 넘어 스포일러인지 여부를 모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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