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12월 마지막 날 국내 개봉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는 다른 월에 개봉 예정이었다 해도 강제로 개봉일을 연말로 옮겨야만 마땅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작품이다. 배우 벤 스틸러가 주연과 연출을 겸한 이 작품은 자신에게 특별한 것도 스스로 잘하는 것도 없다고 믿는 잡지사 ‘라이프’의 직원 ‘월터’(벤 스틸러)를 주인공으로 하여 제목 그대로 상상인 것과 현실인 것 사이의 연결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월터’가 네거티브 필름 인화 부서에 근무한다는 점과 (실제 영화 밖에서도 2007년에 폐간된 것처럼) 잡지사 ‘라이프’가 지면 폐간을 앞두고 있다는 점은 영화에서 특히나 중요하다. 공상과 이른바 ‘멍 때리기’가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 곧 ‘라이프’가 지면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흐름에 뒤쳐진 인물로 묘사된다. 디지털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사옥 저층부에서 허름한 창고 같은 모양새로 명맥을 잇고 있던 필름 인화 부서의 모습 역시 디지털과 필름의 관계처럼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구도를 연상케 한다.
크리스마스와 겹치는 연말은 빠름과 변화로 가득한 일상 속에서 주변은 물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기다.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것을 뜻대로 잘 하였는지, 앞으로 다가올 1년은 어떤 1년이었으면 하는지 등의 질문을 품어보게 한다. ‘월터’에게도 그런 일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온다. ‘라이프’의 마지막 지면 발간을 앞두고 표지로 선정된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이 회사에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월터’는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사진작가로부터 필름을 어떻게든 찾아와야만 하는 ‘모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업무가 아니라 모험이 되는 건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자평했던 ‘월터’가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하나 둘 해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단지 연락처도 일정한 주소지도 없는 사진작가 ‘숀’(숀 펜)의 행로를 추적하는 일로 출발했지만 아이슬란드와 히말라야를 거쳐 잡지사 바깥의 사람들을 만나고 마침내 ‘숀’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얻는 과정으로 향하며 ‘월터’는 상상에 그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마침내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만든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호세 곤잘레즈의 ‘Stay Alive'란 곡이 흘러나온다.)
몇 주 전 새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이 접한 말은 (“축하한다”와 함께) “그래서 어떤 일 하냐”는 것이었다. 일단 영화 콘텐츠를 다루는 일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직무와 분야에 대한 몇 가지를 설명하거나 공유하는 일을 최근 반복 중이다. ‘영화 일’과 ‘영화 일이 아닌 일’ 사이에 무슨 천국과 지옥만큼의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 업계로부터 잠시(가 될지 아주 계속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탈했다는 생각을 멈추지는 못하고 있다. 제약과 식음료, 패션 등 친숙하고도 낯선 분야의 여러 브랜드를 담당하게 되면서 드는 감회는 두 가지다. ‘그동안 영화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과 ‘내 앞에 펼쳐진 세계가 너무나도 넓구나’ 하는 것. 영화와 잠시(라고 믿으며) 떨어져 있는 일을 하면서 ‘영화 일’을 했던 시기의 나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본인 커리어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는 중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북미 포스터에는 ‘Stop Dreaming, Start Living'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대학 시절 대외활동을 하며 알게 되어 멘토와 멘티로서 인연을 잇고 있는 한 기업인은 본인의 경험을 책으로 출간하며 ’Do First, Dream Next'라는 제목을 짓기도 했다. 상상하기 전에 일단 실행해 보는 일. 혹은 상상 속 세상과 현실 세계의 차이를 헤아리는 일. ‘크고 불확실한 행복’을 말하고 다니던 내가 본격적으로 상상 바깥의 현실을 체감하는 중이라고 표현하면 과한 걸까.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영화를 주제로 한 모임과 강의 등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으므로, 완전히 영화로부터 궤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해본다.
자신이 회원 가입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상담원과 통화를 하다가도, 회사에서 마음에 담고 있는 이성 직원을 바라보다가도,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사무실에 나타난 새 임원 앞에서도, ‘월터’는 예고 없이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한다. 예고 없이, 그러나 멈추지 않고서. 그러고 보면 ‘월터’의 상상은 영화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현실에 없는 무엇인가를 진짜로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한 가지는 일단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일 아닐까. ‘월터’는 그러니까, 영화의 모든 여정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인공이 될 자질을 충분히, 아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로 시작하는 실제 잡지사 ‘라이프’의 표어를 가만히 중얼거려 보는 12월이다. 출판사와 온라인 서점에서는 2020년 일력을 판매하고 커피전문점에서도 2020년 다이어리를 내놓는다. 추위와 미세먼지를 오가는 불규칙한 날씨는 불확실함 속에서도 정해진 속도로 2019년의 끝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나는 어디로 움직이는 중일까. ‘12월에 보면 더 좋을 영화’로 종종 언급하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여기에 새로 꺼내며,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을 한다. (2019.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