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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08. 2022

올해에는 큰 바람을 갖지 않을 것이다

2021.12.31. 과 2022.01.01. 사이

이를테면 12월 31일 23시 59분의 잠금 화면과 1월 1일 0시의 잠금 화면을 나란히 찍어두는 일과 같이, 한 해의 마지막과 그다음 해의 시작 사이에서는 언제나 유난하게 마음에 축포를 울리고는 했다. 적어도 한두 해 전까지는. 이번에는 너무나 무감했고 이미 2022년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시계에 이따금 눈길을 주었고 바깥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걸 바라봤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스틸컷을 사용한 스마트폰의 잠금화면


극장 몇 군데의 상영시간표를 뒤적이다 결국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한 해 영화 기록을 돌아보고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을 꺼냈다. 넘기고 싶은 만큼만 넘기고 싶을 때는 책들을 쌓아놓고 넘길 수 있는 기운이 없을 때는 영화관에 가거나 영화를 재생하게 되는데, 오늘의 경우라면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조금 더 능동적인 게 필요했다. 요즘은 할 일이나 하고 싶은 것을 자주 미룬다.


봉천동 '관객의 취향'에서 (박소예, '욱해서 쓴 편지')
강민선, '극장칸'


이른 저녁에는 좋아하는 서점에 있었다. 원래는 다른 책을 사러 간 것이었고 한동안 그것을 읽었는데, 서가를 둘러보다 눈에 띈 게 『극장칸』이었다. 책 뒤표지에 적힌 '셀린'과 '이엘린'이라는 이름이 각각 <비포 선라이즈>(1995)와 <렛 미 인>(2008)의 인물임을 알아챈 순간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사장님, 이 책 혹시 읽어보셨어요?" 그러면서 손대중으로 대강 펼친 곳에는 '켈리 라이카트'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감독의 <퍼스트 카우>(2019)를 아트나인에서 본 게 불과 크리스마스의 일이었으니까 이건 꼭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우연한 연결이었다. 이것이, 2021년에 마지막으로 사서 펼친 책이자 2022년에 처음으로 읽고 있는 책이 되었다.


강민선, '극장칸'
"어느 날에는 현실의 나를 잠시 잊기 위해 영화에 몰입하기도 했다. 어떤 두려움은 그것만으로도 와해되었다."


목차를 보면서 한 번, 서문을 읽으면서 한 번 더 마음 어디선가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내 마음을 들킨 기분과 상대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문장이었다. 고요한 연말을 보내면서도 이따금 어떤 연결을 체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꼭 영화에 대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닌 이 언어들이 가만히 말을 걸어주는 듯했다. 작가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하고자 하는 말이 또렷했고 영화와 기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순간이면 충분하다'라고 쓰다 '충분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고쳤다. 올해는 큰 바람을 갖지 않을 것이다. (2022.01.01.)


2021년 12월 31일 저녁, 퇴근길
“환하게 열릴 한 해의 시간들 속에서 어떤 바람을 품어야 할까요. 그 바람은 어떻게 현실이 될까요. 그리고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꺼내게 될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음의 바람과 삶의 현실과 인간의 말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멀지 않음의 힘으로 우리는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오래된 저의 바람입니다."
-박준, 「십이월 산문」 (『계절 산문』, 달, 2021)

매해 이 무렵이 되면 지난 것들을 떠올리고 하지 못했거나 했어야 했거나 하는 일들을 생각하는 게 익숙했다. 박준의 새 산문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이 많다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161쪽)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또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바람을 다가온 것으로 이루어내는 데 조금 더 많은 마음을 기울이겠다고 쓴다. (2021.12.31.)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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