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pr 16. 2022

유년 시절이 끝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영화 '작은 아씨들'(2019) 리뷰

<레이디 버드>(2017)에 이어 그레타 거윅이 감독한 영화 <작은 아씨들>(2019)은 이미 여섯 차례나 영상으로 옮겨진,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미국의 남북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소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다) 네 자매의 일상을 그린 <작은 아씨들>의 개봉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건 <레이디 버드>에 이어 그레타 거윅과 시얼샤 로넌의 협업이 다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다름 아닌 시얼샤 로넌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둘째 ‘조’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이 <작은 아씨들>을 말할 때 특히 중요할 텐데, 이것은 작품의 주인공 ‘조’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 ‘작은 아씨들’을 집필하기 때문이다. 픽션을 통해 자전을 담는 작가들에게 나는 늘 일정 수준 이상의 동경과 흠모를 갖고 있다. 지나온 삶의 방향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일이 앞으로 나아갈 곳을 바라보는 것, 혹은 거기에 미치지 않더라도 지금 발 딛고 선 이 자리를 살피는 일과 맞닿아 있다고 믿어서다.


7년이라는 시간적 범위 내에서 지난 시점과 현재 시점을 유려하게 오가는 <작은 아씨들>을 보며 마음에 와 박힐 수밖에 없었던 말은 ‘조’의 “유년 시절이 끝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였다. 언제고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른의 일, ‘메그’(엠마 왓슨)에게도, ‘베스’(엘리자 스캔런)에게도, ‘에이미’(플로렌스 퓨)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조’ 자신에게도.


엄마 ‘마미’(로라 던)(‘Mommy'가 아니라 ’Marmee'다. 물론 언어적 유희를 노린 작명이기도 할 것이다.)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다. 나는 이 말의 함의에 시간이 흐르는 일이라든가 가족 구성원이 나이가 들고 각자 삶의 환경이 바뀌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느낀다. 억누를 수도 굽힐 수도 없이 살아지는 게 삶이지만, 동시에 그 삶은 스스로가 갖고 있는 가치관과 주체성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 더 가치 있게 된다. 되어간다.


여기서의 ‘가치’란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일 같은 게 아니다. 소설가 김연수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해피 엔딩을 함께하지 못할 수 있으며 아픔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삶은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작고 작은 먼지 같은 무엇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단치 않은 삶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세우고 주어진 환경 앞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고 최선이라고 믿는 것을 그럼에도 추구해보는 일. 배우이자 감독 그레타 거윅은 “주체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찾아가는 젊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는 영화의 연출은 물론 각색까지 도맡았다.)


<작은 아씨들>은 화자이자 주인공 ‘조’를 중심으로 하되 네 자매 모두와 부모, 그리고 이들의 일상에 주요한 영향을 주는 ‘로리’(티모시 샬라메)를 비롯해 ‘작은’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다. 각 인물에게 찾아오는 사건들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들이 인과적 선후 관계로 존재하는 것 보다 매 순간 자체가 소중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지나간 순간들은 돌아오지 않고 유한한 삶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늙고 병들고, 좌절하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 하나하나가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건 겨울이 지나고 곧 꽃이 핀다는 자명함을 알고 믿듯이, 계절의 흘러감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되 쉽게 굽히지도 않고 타자를 억누르지도 않는, 사소함과 평범함의 순리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조’는 그 모든 과정들 속에서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 진행형일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완성한다. 자기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유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 역시 그럴 것이다. (2020.02.12.)



영화 '작은 아씨들' 국내 포스터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그레타 거윅 감독

2020년 2월 12일 (국내) 개봉, 135분, 전체 관람가.


출연: 시얼샤 로넌, 엠마 왓슨, 플로렌스 퓨, 엘리자 스캔런, 티모시 샬라메, 로라 던, 밥 오덴커크, 메릴 스트립, 루이 가렐, 제임스 노턴, 트레이시 레츠, 크리스 쿠퍼 등.


수입/배급: 소니픽처스코리아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더 이상 날 미워하지 않기로 했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