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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16. 2022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영화 '작은 아씨들'(2019) 리뷰(2)

https://brunch.co.kr/@cosmos-j/1412


이 글은, <작은 아씨들>(2019)이 국내 개봉한 2월 12일에 쓴 것을 고쳐서 혹은 이어서 쓰는 글이다. 여기서 실토하건대 영화 개봉일이었던 그날은 영화 시작 후 약 10분 정도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너무 늦게 나선 탓이었다. 대부분 사소하게 여기고 잘 집중하지 않는 영화 초반에 심각한 사건이 일어날 것도 아닐 테고 <작은 아씨들>의 줄거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그 10분 때문에 나는 <작은 아씨들>을 관람했다고 확신에 차 있는 채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글은, <작은 아씨들>에 대해 진정 처음 쓰는 이야기라고 해야 한다. 3주 전과 지금 사이에 달라진 게 있다면, 시얼샤 로넌 대신 위노나 라이더가 ‘조’ 역을 맡은 <작은 아씨들>(1994)을 넷플릭스에서 재감상 했다는 것이고, (상술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영화 오리지널 커버’임을 내세워 리커버로 출간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원작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처럼 완결되지 않고 다시 쓰이거나 고쳐 쓰일 때가 많다. 하물며 소설 <작은 아씨들>의 영상화에 대해서라면 어떨까. 그레타 거윅이 감독한 <작은 아씨들>(2019)을 제외하고도 이미 이 작품은 영상으로 여섯 번 옮겨졌다. <스타 이즈 본>(2018) 이전에 이미 세 편의 <스타 탄생>(1937, 1954, 1976)이 있었고 그들 각자의 비슷하고도 고유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작은 아씨들>에게도 역시 수많은 ‘아씨들들’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1994년작에서 수잔 서랜든이 연기한 마치 부인(2019년작의 로라 던이 연기한 ‘마미’(Marmee))이 하는 이야기 중 대략 이런 말이 있다. “너희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 그런 세상에서 사는 너희들은 또 다음 사람들에게 그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



이것이야말로 했던 이야기, 이미 만들어졌던 이야기를 꺼내서 다시 만드는 일이 필요한 이유라고 <작은 아씨들>을 보면서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것을 2019년작 <작은 아씨들>은 너무도 정확하게 간파한 채로 연출과 각색을 해낸다. 누군가가 치던 피아노를 다른 사람이 받아 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이어서 연주하는 일. 똑같은 장면을 두 번 보여주고 같은 말을 두 번 하며, 어떤 사람과 재회했을 때 그 사람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플래시백 하는 일.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단어 하나를 고쳐 새로 하는 일. (‘로리’(티모시 샬라메)는 ‘에이미’(플로렌스 퓨)에게 “You look beautiful.”이라고 했다가 이어서 “You are beautiful.”이라고 고쳐 말한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그 외에도 산재해 있는 영화 속 숱한 반복과 변주는 시점상 7년 전(과거)과 7년 후(현재)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서사 흐름 및 편집의 특성 때문에 중요하게 된다. 인생이란 게 어떤 것도 다시 돌아올 수 없고 반복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어서다. 픽션과 달리 현실은 짐작과는 달리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다. 말하자면 써서 밀봉한 편지를 우편함에서 다시 꺼내서 찢어버려야 할 일이 누군가에게는 일어난다. 자신에게 일어나리라고 굳게 믿고 바라왔던 일이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그러고 나서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봐’ 하고 자조하는 일이 현실의 일이라면, 책 속의 일은 다를 수 있다. “책 속 주인공이면 참 쉬웠을 텐데” 하고 중얼거려 본 사람은 책을 쓰면서 그 일을 되돌리거나, 혹은 한 번 더 일어나게 하면서 책 속 인물이 자신은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하고 성장을 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


이런 일들은 사실 사소한 것이다. <작은 아씨들>로 말하자면 단순한 성장담만을 말하기는 부족하지 않을까.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이는 시대적 배경에 관한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던 시대. ‘여성이 쓴 글은 안 팔려서’ 필명이나 익명으로 글을 대신 썼던 시대. 결혼이 곧 경제적인 거래였던, 많은 이들에게 결혼만이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길이었던 시대.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그 시대에 루이자 메이 올컷은, 그리고 그가 쓴 이야기 속 조 마치는 글을 썼다. 처음에는 ‘친구가 쓴 글’이라고 했던 ‘조’는 당당하게 자신이 쓴 이야기임을 밝히고 편집자와 인세를 흥정하며 판권을 넘기지 않는다. 그 글은 자신이 겪고 보고 듣고 느껴온,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의 많고 많은 빛나는 장면 중 해변에서의 대화. ‘베스’(엘리자 스캔런)에게 ‘조’는 자기가 쓴 글을 읽어주기 전에 아마도 브론테 자매의 문장이었을, 다른 이야기를 읽어준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모든 것이 자명하고 또 자명하기에 사랑받는 이 달콤한 단조로움.” 그 단조로운 이야기들이 100년도 넘게 이야기 되어 나날이 새로워지고 변화한다. 그 단조로움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이야기를 결코 만나지 못했으리라.


숱한 일들의 희로애락을 지나온 ‘조’는 어떤 계기로 인해 쓰지 않겠다고 했었던 결심을 꺾고, 다시 글을 쓴다. 그에게 마찬가지로 비슷한 종류의 숱한 일들을 지나온 ‘에이미’는 이렇게 말해준다.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작은 아씨들>이 ‘팔리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있을 수많은 골방 작가들에게 하는 말이며,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10분 정도의 놓친 장면들’에 관해서는 또 한 편의 글을 쓰고 싶다. 당신이 읽어준다면. (2020.03.04.)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상기의 글을 작성할 당시 '아마도 브론테 자매의 문장이었을' 것이라 언급한 대목은 사실 브론테의 것이 아니다.

조지 엘리엇의 소설 『플로스 강변의 물레방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가 이 땅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음은 이 땅에서 보낸 유년 시절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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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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