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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09. 2022

그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영화 '테넷'(2020)이 개봉하기 전

‘여름에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어쩌지’ 같은 상상 혹은 걱정을 하던 3월, 가족의 일로 부산에 하루 다녀왔다. 그때 나는 <씨네21> 1243호에 실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재난 속에서의 웃음, 계획을 가질 권리’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고 “아주 약간의 미래만이라도 주어진다면 누구도 자기 삶을 스스로 파괴하지는 않는다.”라는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마스크를 쓰고는 있지만 생업과 일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생과 안전에 주의는 기울이되 평소와 비슷한 정도의 일상을 유지하는 일이 막연한 불안감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코로나 19’가 미국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건 국내에서 그것과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정도는 훨씬 더 심각했다. 영화 업계로 한정해 말하자면 세계 시장을 무대로 하는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촬영을 중단하거나 개봉 일정을 연기했고, 많은 극장이 문을 닫았다. (국내에서도 일부 멀티플렉스가 휴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다수는 상영회차를 축소한 채로 영업을 지속했다.)


3월 21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Movie theaters are a vital part of American social life. They will need our help.’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워싱턴 포스트>에 실었다. (전문 링크) ‘극장은 사회(사교) 생활의 중요한 영역이며 그들(극장)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라는 말. 글에는 극장이 단지 음향이나 영상 기술, 팝콘, 배우의 얼굴만을 만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를 경험하 위해 있는 장소라는 요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 놀란 감독은 영사실 장비를 다루거나 티켓을 발권하고 홍보물을 제작하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등 극장이 돌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 즉 영화 산업 전반에 관한 언급도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물론 OTT 서비스 등을 이용해 극장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영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창구가 많이 있지만,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건 단지 극장이 문을 닫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산업이 멈추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그의 기고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래도록 극장이 주는 본연의 경험을 옹호해온 인물이라고 해서 저 글을 순전히 영화 예술을 향한 낭만과 현실 세계가 호전될 것이라는 희망의 관점으로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일상이 멈추다 끝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영화는 업계 종사자들과 관객이 없다면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라며 그는 ‘The need for collective human engagement’라는 표현을 통해 엔터테인먼트를 매개로 저마다의 사람들이 웃고 우는 경험과 그것을 타인과 나누는 일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역설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3년만의 신작 <테넷>(2020)은 <007 노 타임 투 다이>나 <블랙 위도우>, <분노의 질주 9>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할리우드 대작들이 개봉 일정을 11월, 심지어 내년으로까지 연기하는 동안 처음 예정한 시기를 고수 중인 거의 몇 안 되는 영화다. 업계에서는 <테넷>의 개봉 시기가 올해 영화계의 흥행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 <테넷>이 역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작품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이기도 한 데다, 많은 영화들이 흥행을 우려해 개봉을 연기하거나 아예 극장 개봉을 포기하는 상황이 오히려 불황을 더 고조시키는 듯 보이는 현재 ‘극장이 열려 있음’을 알리는 큰 영화의 존재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테넷' 스틸컷


북미 영화 전문 매체 <시네마 블렌드>의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현지 멀티플렉스 체인 중 하나인 ‘시네마크’(Cinemark)의 CEO인 마크 조라디는 <테넷>이 개봉할 무렵에 극장 운영이 거의 정상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미국극장주협회(NATO) 역시 경제 전문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를 통해 <테넷>이 개봉할 시기에 전체 극장의 약 90% 정도는 운영을 재개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캘리포니아 주 공중보건 당국 역시 좌석 간 거리두기 등을 골자로 하는 ‘실내 영화관 운영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워너브러더스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랜 기간 협업해왔고 극장을 중시하는 놀란 감독의 성향을 고려하면 유니버설의 <트롤: 월드 투어>처럼 극장 개봉과 VOD 서비스를 동시에 진행한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기의 문제겠지만 과연 <테넷>은 ‘정상적’으로 개봉할 수 있을까. 영화의 공개된 예고편 중에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연기한 인물이 “It hasn’t happened yet.”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테넷>은 최초 예고편 공개 역시 온라인이 아닌 극장을 통해 먼저 진행했고, 12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2019) 북미 개봉 당시 현지 IMAX 상영관을 통해 약 6분 정도의 프롤로그를 공개하기도 했다. 철저한 보안 유지로 세부 내용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작품이라 <테넷>의 주목도는 여느 신작보다 더 높은 상황. 예고편 번역 정도를 제외하면 아직 본격적인 개봉 준비에 들어가지 않은 국내에서도 7월 개봉 여부는 불확실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꼭 예정된 시기에 ‘극장’에서 <테넷>이 상영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영화 한 편이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큰 영화가 개봉하지 않는 한 극장의 불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희망을 담은 말이 되기도 한다. (2020.06.12.)


*이 글은 영화 <테넷>이 북미 7월 17일 개봉 예정, 국내 개봉 시기는 미정이던 때 썼다. <테넷>은 2020년 8월 26일 국내 개봉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전 세계 극장에서 3억 6,529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영화 '테넷' 국내 메인 포스터


https://brunch.co.kr/@cosmos-j/1098


김동진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외 활동 아카이브: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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