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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20. 2022

우리에겐 미소 지을 일이 제법 있었다

영화 ‘환상의 마로나’(2019) 리뷰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면, 페이퍼 타월을 쓸지 핸드드라이어를 쓸지 잠시 고민하곤 한. 손수건을 가지고 있지만 요즘처럼 손을 특히 자주 씻을 수밖에 없는 시기에 매번 꺼내 쓰자니 손수건이 젖은 채로 있는  신경 쓰이기도 해서, 결국은 핸드드라이어 쪽으로 손이 향한다. 한쪽은 종이를 쓰고 한쪽은 전기를 쓰니, 어느 쪽이든 에너지를 사용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후자가 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는 작은 생각에서. 정부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 실현하겠다는 발표를 한 적 있는데, 반가운 흐름이지만 한국은 2009 이후 지금까지 온실가스 배출 목표치를 지킨 적이  번도 없다고 한. 그러니까 가령 ‘지구가 아프다같은 표현을 접할 때면 그래서 ‘어쩌면 인간만 없으면 지구는 아프지 않을  있는  아닌가싶기도 하. 이미 생명체에게는 어떤 위협이   있을지라도 지구 스스로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수십  년을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생에는 우주 어딘가의 외계 귀족 고양이(?) 태어나야 할까.


지금 다룰 작품은 에너지와 어쩌면 크게 관련이 없을 수 있기는 하다. 다만 ‘인간’ 중심의 사고로 우리가 지구 환경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마음에 ‘개’의 시점에서 견생을 바라보(려고 상상하고 노력하)는 작품 하나를 가져다 꺼내보기로 했다. 루마니아 감독 안카 다미안이 연출한 <환상의 마로나>(2019)다. 국내에는 2020년 6월 극장 개봉했다. <환상의 마로나>를 요컨대 반려동물을 한 번도 가족으로 맞이해본 적 없는 사람이어도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견생이 환상적이었다는 게 아니라 이것을 가능한 개의 시점으로 구현해내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환상적(Fantastic Tale)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영화 '환상의 마로나' 스틸컷
JTBC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2018)를 볼 당시 “웃어요, 행복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뇌리에 남았다. 안면인식 장애를 겪는 중인 '서도재'(이민기)가 정상급 인기를 누리는 배우 '한세계'(서현진)에게 해주었던 말. 행복을 가장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적어도 그 드라마는 “그럴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행복해지자’나 ‘행복하게 살아야지’ 같은 다짐이나 예견이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라는 현재적 상태. <환상의 마로나>의 주인공 '마로나'는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죽었다. 로드킬을 당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가며 떠돌며 살았던 '마로나'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다들 괜찮다면 내 생의 영화를 돌려보겠다”라며 <환상의 마로나>의 이야기는 ‘마로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선명하게 끝난 자리에서부터, 다시 처음의 기억을 향하여. 만약 ‘떠돌며 살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라는 명제가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거기 ‘내 생의 영화가 있다’라고 하는 건 태어남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간들에 그래도 행복한 일들도 있었다는 뜻이 아닐는지. 개의 시점을 상상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건 물론 애니메이션이어서 가능한 것이겠다. 다만 그 출발은 안카 다미안 감독 본인의 경험에서였다. 실제로 ‘마로나’라는 이름의 유기견을 임시 보호했던 일을 기반으로 감독의 아들인 앙헬 다미안이 시나리오를 썼다. (실제 '마로나'는 아직 생존해 있다고 한다.)


<환상의 마로나>를 통틀어 ‘마로나’의 이름은 총 네 번에 걸쳐 주어지고 바뀐다. ‘아홉’에서 시작해 ‘아나’, ‘사라’, 그리고 ‘마로나’까지. (특정 이름을 지칭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글에서는 ‘마로나’로 통일할 예정) 여러 명의 주인들은 조금씩 다른 각자의 이유로 개를 보내거나 버린다. 여기에는 어린 개에서부터 시작해 성년이 되기까지 ‘마로나’의 견생 주기가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사람으로 따지면 유아기부터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이후까지겠다.


사람들이 이기적인 이유로 개를 버리고 또 유기견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환상의 마로나>가 평면적인 선악의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시점에서 생각하자면 사람의 언어를 쓰지 않는 개들이 일종의 ‘발화되지 않은 채의 의사소통’에 더 뛰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이미 다 간파할 수도 있지만 <환상의 마로나>의 ‘마로나’ 시점은 단지 ‘인간들을 관찰’하는 것 자체에 있다. 특정한 가치 판단을 할지라도 ‘마로나’의 내면 세계와 순간의 감정들은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져 표현될 뿐 대부분 발화되지 않는다. ‘마로나’ 시점의 내레이션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영화 '환상의 마로나' 스틸컷


‘마로나’는 다만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다. 인간들은 참 이상해. 행복이 작고 가까운 것에 있다는 걸 잘 깨닫지를 못해.” 표면적으로 <환상의 마로나>가 견생을 회고하는 방식은 사람에게 개의 그것에 이입하라고 종용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스스로 돌아보도록 하고자 여러 경로를 경유하는 데 있는 듯 보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행복의 기준과 가치를 개에 대입해보도록 하면서.



영화의 오프닝부터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보면 <환상의 마로나>의 세계에 대해 약간이나마 그 이미지를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시작은 길 위. 길 위에서 일단 시작된다. 차가 거세게 경적을 울리거나 쌩 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버리는 왕복 차선 도로. 빠르게 달리던 차가 급정거하고, <환상의 마로나>가 보여주는 것은 ‘마로나’의 죽은 몸이 아니라 마치 영혼처럼 형상화된 그의 모습이다. ‘마로나’의 마지막 주인인 소녀 ‘솔랑주’ 역시 그의 곁으로 다가와 함께 모로 눕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둘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마로나’와 ‘솔랑주’ 역시 마치 거기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된 이미지로서 관객에게 보이게 되지만 둘을 좌우로 지나가는 차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인다.


“여기는… 영점의 영점이다.
무가 되는 순간. 아스팔트 위의 얼룩.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영화의 첫 내레이션


‘사람들이 죽을 때는 그런다고 들었다’라며 ‘마로나’는 인생이 영화처럼 스쳐가듯 자기의 생이 지금 스쳐간다고 말한다. ‘마로나’는 시작부터 인간에게 개가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는 자신의 출생 이전 즉 부모가 서로 만나기 전의 이야기까지 시각적 이미지로 담겨 있기 때문에 ‘마로나’ 스스로는 다 알 수 없는, 일종의 전지적이고 초월적인 시선이 내포된다. (그래서 ‘Fantastic Tale’이기도 한 것이겠지.)


“행복은 숫자 9 같고 우유 맛이 난다.”


게다가 ‘마로나’는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난 스토리텔러이기까지 하다. 인간에게 행복은 이런 것이라고 그 관념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갓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처음 경험한 스스로의 행복감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환상의 마로나>는 영화가 아닌 시각예술을 전공한 안카 다미안 감독과 그와 협업한 여러 베테랑 애니메이터들의 재능과 취향 등에 충실해 ‘마로나’의 스토리텔링을 고스란히 이미지와 영상으로 구현한다. 우유 맛 언급 부분의 다음 내레이션은 “모든 걱정을 씻어 주는 따뜻하고 축축한 혀.” 이것 역시 스스로의 태초와 밀접하고 구체적인 연관이 있는 서술이다.


영화 '환상의 마로나' 스틸컷


동물백과 속 개구리가 살아 움직이는 개구리가 되어 튀어 오른다든지 어린 ‘마로나’ 자신이 책 속으로 들어가 책 안의 기호가 되는 것과 같은 애니메이션의 특장점이 <환상의 마로나>의 91분 남짓 상영시간 내내 꽉 차 있다. 능히 이것은 하나의 우주가 된다. ‘마로나’의 둥글고 빛나는 눈으로부터, 영화의 1.85대 1 화면비 안에 들어오는 거대하고 끝 모를 세계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는 인간 관객의 시점이 아니라 ‘마로나’의 생 전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동반자처럼 그의 회고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환상의 마로나>에 관한 해외 평을 읽다가 메모해 두었던 내용이 있다. RogerEbert.com의 평론가 맷 졸러 세이츠가 쓴 평문을 보고 기억에 남았던 문장이다. 자의적으로 대략 뜻을 옮기자면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개를 개 그 자체로 감사히 여기는 만화다. 개의 생을 엄숙함과 동정심을 갖고 바라보는데 그것(엄숙함과 동정심)은 전혀 보잘것없거나 평범했지만 어떤 이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었던 누군가를 추모할 때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건 조금 우회적으로 설명하면, 예를 들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 같은 작품을 말할 때 (그 영화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아직 생존해 있지만) 유효하기도 하다. <로마>의 주인공인 가정부 ‘클레오’는 보통의 영화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않았을 인물이지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자신의 기억과 그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그를 시네마의 근사한 주인공으로, 그의 이야기를 아주 아름다운 헌사로 그려냈다. 결국 <환상의 마로나>가 주는 체험은 누군가의 반려동물로서가 아니라 그 생명체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영화 '환상의 마로나' 스틸컷

자체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를 테면 <토이 스토리 4>(2019)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와도 비슷하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삼부작에 걸쳐 만들어진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물론 그 자체로 아주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2019년의 4편은 앞선 세 편이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해냈다. ‘장난감들이 사람이 안 볼 때 살아서 움직인다면?’라는 가정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면서 오늘날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으로 통하는 픽사 스토리텔링의 틀을 닦았지만 인간의 시점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장난감이란 인간이 주인인 채 가지고 노는 물건이자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먼지가 쌓이고 버려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 4>는 장난감에게도 ‘삶’을 주는 작품이다. 2편 이후 등장하지 않았던 캐릭터인 ‘보 핍’이 인간의 소유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생을 개척해낸 이야기를 보여준다. 앞선 세 편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으면서도 4편은 네 편 중 가장 장난감의 시점에 가까이 있다.


https://brunch.co.kr/@cosmos-j/660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바탕이 되거나 인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른 반려동물을 캐릭터나 주인공으로 가져오는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환상의 마로나>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로나’ 시점에서의 ‘견생’을 구현했다. 영화 <톰과 제리>(2021)가 ‘톰’과 ‘제리’만 셀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고 나머지는 실사로 찍은 건 이 작품 특유의 초월적 물리 법칙을 구현하기 위해서인데 예컨대 ‘톰과 제리’ 만화를 본 이들은 기억하겠지만 ‘제리’가 ‘톰’을 골탕 먹이고 기절한 ‘톰’의 한쪽 귀로 들어가 눈을 통과해 다른 쪽 귀로 나온다든가 쥐 구멍을 옆으로 들어 옮겨서 ‘톰’이 벽에 박치기를 하게 만드는 등의 장면들이 있다.


위와 그 결은 서로 다르지만, <환상의 마로나> 역시 인간 기준에서의 물리 법칙들을 대부분 다 거스름으로써 ‘마로나’의 시점에 한층 가까워진다. 가령 ‘마로나’의 두 번째 주인인 ‘마놀’은 곡예사다. 거리에서 각종 재주를 뽐내며 사람들에게 팁을 받는 그는 처음 ‘마로나’의 주인이 되었을 때 ‘마로나’가 보기에 아주 신기하고 낯설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놀’을 <환상의 마로나>는 키가 몇 미터도 되었다가 팔이 여러 개였다가 연체 동물이라도 되는 양 신체 이곳저곳이 자유롭게 접히고 굽어지는 등 애니메이션을 통한 곡예 자체로서 묘사한다. ‘마로나’가 첫 주인으로부터 팔린 뒤 도시의 낯선 사람들과 시가지의 위협적인 풍경들을 마주할 때 역시 사람들의 눈은 주로 빨갛거나 초록색으로 표현되어 있고 몸과 몸 바깥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거나 몸통이 아닌 선형으로 처리되어 있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것 역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인간 시점에서의 상상력을 토대로 한 것이겠지만 이것을 보완해주는 게 유기견을 보호하면서 경험한 안카 다미안 감독의 어떤 진심일 듯하다. 감독과 작가와 애니메이터들이 긴밀히 협업해 만들어낸 이 ‘환상적’인 결과물은 결국 맨 처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행복에 관한 이야기라면 우리가 이미 지겹게도 들었을 법하지만 그게 위와 같은 작법을 통해서라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마로나’는 원래 첫 이름이 ‘아홉’이었다. 어미가 낳은 새끼가 아홉인데 그 중 아홉째여서 그냥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이름. 그러나 곡예사 ‘마놀’은 ‘마로나’를 천진하고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돈은 별로 없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마놀’을 향해 ‘마로나’는 속으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금자리가 생겼고, 자신이 돌볼 주인이 생겼고, 그리고 이름이 생겼다. ‘마로나’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뭘 가져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많은 걸 갖게 되자 다 망칠까 봐 겁이 났다.”


이때의 ‘마로나’는 아직 유년에 해당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생전 처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이 낯설었을 것이다. 자신의 첫 주인이었던 인간도 그를 금세 팔아 넘겼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 역시 금방 헤어져버렸으므로, ‘마로나’에게 그것들은 단지 낯선 경험이기만 한 게 아니라 상처가 되었기도 하겠다. (그래서 ‘마로나’는 “아홉째여서 뼈다귀도 1/9 이었다”라는 내용의 회고를 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이 만들었으니 <환상의 마로나>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진정한 ‘개의 이야기’ 자체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마로나’가 몇 번 이름이 바뀌고 몇 번 새 주인을 만나며 회고하는 스스로의 생은 결코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초월적인 무엇을 담고 있는 것만 같다. 만약 어떤 이가 나에게 그러한 사랑을 준다면, 그것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건 죄악이라고까지 말해볼 수 있을 만큼.


이 모든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마침표를 찍고 싶은 건, ‘마로나’가 자신의 다난했던 생에서 행복의 가치를 발견해내고 그것들을 스스로 회고했다는 점이다. 그 누가 무엇이라 말해도, ‘마로나’가 그렇게 회고했다면 그것은 행복이 깃들어 있는 삶이었을 것이다. 3년 전 여름 소설가 김애란의 강연을 들으면서 기억에 남았던 대목이 있다. 내 삶의 이야기에 지위를 주는 것. 그렇게 이야기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전달될 수 없는 진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이것은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쁜 소식들 앞에서, 그리고 더 나쁜 소식들 앞에서. 우리는 결국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 간신히 웃을 만한 일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한 계절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미소 지을 일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영화 '환상의 마로나' 국내 포스터


*2020년 12월에 쓴 원고 '행복했던 것처럼 회고하기'를 조금 다듬었다.



https://brunch.co.kr/@cosmos-j/1054



김동진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외 활동 아카이브: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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