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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1. 2016

재난 앞에서 영화가 타협하고자 했던 지점들

<부산행>(2016), 연상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 <부산행>이 향하는 곳은 얼핏 매우 명확해보인다. 전국을 뒤덮은 좀비 바이러스 속 유일하게 안전한 도시 부산. 부산으로만 가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은 어떻게 초기 대응에 성공했는지, 앞으로도 부산은 계속 안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것들은 물론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KTX 열차를 타러 서울역으로 향하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이미 재난은 여러가지 징후를 통해 예고된 상태. 열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미 그들은 '부산행'이 아니라 '좀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왜 재난의 근원을 좀비 바이러스로 설정했는지는 이 글이 아니더라도 숱하게 많은 논의가 되어 왔기에 굳이 다루지 않아도 좋을 듯 싶다. 중요한 것은 열차에 오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며 이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무엇(혹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부산행>의 모든 인물들은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과 오로지 자신만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은 아무렇지 않게 좀비들에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 정도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석우'(공유) 역시 "이럴 때는 나를 먼저 생각하면 된다"며 '수안'(김수안)에게 타이르고, 또 다른 장면 '성경'(정유미)은 "다들 두려워서 그런 거"라며 거든다. 아무런 정보 없이 시시각각 쏟아져 오는 좀비 무리들의 공포 속에 사람들은 나약해질 수밖에 없고, 도망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급기야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도 객차 출입문을 닫기에 이른다. 여기서 <부산행>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좀비'가 올라 있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재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내보인다.


한국 영화에서 제대로 시도되지는 않았던 '좀비'라는 소재를 재난에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비록 홍보용 장르명이긴 하나 '전대미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명칭은 <부산행>에 꽤나 어울린다. 군더더기 없는 적당한 이야기 전개와 함께 관객의 몰입을 배가하는 캐릭터까지. 각 신들의 연출에서부터 촬영 방식과 편집 등 전반적으로 크게 흠잡을 만한 부분도 딱히 없다. 그러나 <부산행>의 아쉬운 점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감독의 첫 실사영화 연출작임을 감안하더라도, 기존의 상업 재난영화들이 갈고 닦아왔던 것에서 벗어나거나 변화하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 좋은 장점들을 하나로 욱여넣는 것까진 좋았는데, 제대로 집중한 것, 다시 말해 뚜렷한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도 희박하다.



국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라는 특성은 속도감으로 구현되지 못하고 그저 바깥과 고립되었다는 공간적 느낌으로만 다뤄진다. (실제 달리는 열차가 아님에도 이를 실감나게 표현해낸 것은 고무적이다.) 그리 길지 않은 상영 시간에도 비교적 초반부터 몰아치는 재난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려 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인물들에게 코믹함을 부여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할 수 있는 가족적 감정도 부여하느라 극의 중심은 인물에 있기보다 그저 달리는 기차 자체에 있을 때가 많다. 액션이 단조롭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중심을 잃지 않게 해주는 요소일지도 모르지만, 누구에게 중심을 잡아야 할지 모호한 상황에서 어느새 '석우'와 '상화'와 '영국'(최우식)은 모 영화에서 본 것처럼 좀비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각자의 역할 분담까지 해낸다. 조금 전까지 날을 세우며 서로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던 그들은 어느새 소중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초월적인 감정 하에 의기투합해 조금 전까지 그 실체도 몰랐던 상대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물론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연인이라는 데에서 오는 물리적 내지는 이성적 요소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존재하며, 이들이 좀비들이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 학습해나가는 과정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하지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다.



요컨대 캐릭터들을 한데 뭉치고 또 떨어뜨리는, 조합의 방식이 영화의 목적을 위해 너무 기능적이라는 데에 상기 언급한 아쉬움이 있다. 훌륭한 재난 영화들은 많은 것에 일일이 시선을 주지 않고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달릴 줄 안다. 그러나 <부산행>은 달릴 수 있는 좋은 동력에도 불구하고 종종 한눈을 팔며 스스로 속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러다 "더 이상 부산으로 운행할 수 없게 된" <부산행> 열차가 닿는 곳은 좀비로부터 안전한 도시도, 좀비를 막을 수 있는 해결책도 아닌, 무력한 사람들이 맞이하는 삶의 위기와 이를 초래한 사회적 보호망의 부재를 돌아보는 것 그 자체에 있으며, 허구적 이야기임에도 최근 우리 사회의 몇 가지 화두를 떠올리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다만 결말에 이르러 <부산행>은 희망적인 여지를 하나 남겨둔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부터 맨 아래의 구성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성경'과 '수안'처럼 주변을 이타적으로 돌아보고 챙길 줄 안다면 결국 조금 더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널 끝 희미하게 보이는 빛이 <부산행>이 도달한 종착지다. '우린 누구나 미지의 공포 앞에 약해질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그 중 세심하고 사려 깊은 누군가는 이를 보듬고 우릴 희망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몇 가지 의문이 남았다. 중반부 좀비로 변한 할머니의 눈은 왜 굳이 다른 좀비들과 다르게 보였을까. 그 눈을 본 다른 할머니의 "놀고들 있네" 같은 대사는 꼭 필요했을까. 하필 펀드매니저로 설정된 '석우'의 직업은 좀비 바이러스와 연관성을 가져야 했을까. '상화'는 돌연 "아빠들은 원래 희생하는 거"라며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기 위한 캐릭터가 되었을까. 의문들을 투박하게 정리해보고는 스스로 나름의 결론을 내려본다. 극장 최대 성수기 관객들을 위한 완충적인 타협점을 마련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라고. 적나라한 사회 비판도(<부산행>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메시지를 요즘의 상업영화들은 이미 다 갖추고 있다.), 전대미문 재난의 극적인 공포도, 캐릭터에 굳이 많은 사연을 불어넣지 않을 줄 아는 집중력도, 재난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부산행>은 관객의 입맛을 위해 일정 부분 솎아내고 '휴먼 밀실 코믹 SF 액션 재난 블록버스터'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 7/10점.)



<부산행>(2016), 연상호

2016년 7월 20일 개봉, 118분, 15세 관람가.


출연: 공유, 정유미, 마동석, 김수안, 김의성, 최우식, 안소희, 최귀화, 정석용, 예수정, 박명신, 장혁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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