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2016), 김성훈
2013년 출간된 소재원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터널>은 일면 그럴 듯한 영화다.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타이틀 하에 과도하게 극적인 연출과 신파적 서사로 점철되었던 여타의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담백하고 담담한 편이고, 관객의 눈시울을 적실 만한 상황도 비교적 자연스럽다. <더 테러 라이브>(2013)로 원톱 주연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하정우라는 마스크를 입은 <터널>은 평범한 가장에게 찾아온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의 상황을 가정하여 우리 사회의 '예상할 수 있었을' 재난의 병폐를 파헤치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를 이끄는 핵심적인 동력은 '정수'(하정우)가 아내 '세현'(배두나, 원작에서는 이름이 '미나'로 설정돼 있다.)을 비롯해 구조반장 '대경'(오달수) 등 주변인과 연대를 맺는 방식과 과정에 있으며, 많은 경우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휴대전화가 소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2015)의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와 거의 동일한 캐릭터로 설정된 '정수'의 (굳이 영화 속 '먹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낙천적이고 담담한 모습은 오히려 두드러지게 영화의 현실감을 감소시킨다.
상업영화로서 일정한 독자성을 지니는 영화 <터널>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원작소설 <터널>을 언급하는 것은 관객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원작이 쓰인 시점과 각색 방식을 생각해 볼 때, 소설에서 영화로 넘어오면서 달라진 지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소설 <터널>의 정식 출간은 2013년에 이루어졌으나, 책에서 밝히는 바 소재원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시점은 공식적인 데뷔작 <나는 텐프로였다>(영화 <비스티 보이즈>(2008)의 원작)보다도 이전이다. 원작은 영화와 동일하게 '정수'가 완공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널에 갇히는 재난을 상황으로 설정하지만 재난 자체보다는 한 사건을 바라보는 언론과 대중의 역할과 그 태도의 변화가 중심이 되는, 다소 냉정하고 세태고발적인 소설이다. 특히 '마녀사냥'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대중이 '알 권리'라는 오명 하에 언론에 호도되며 사건의 당사자를 마음대로 '소비'하는, 미디어의 음울한 단면을 강렬하게 파헤친다.
영화와 소설의 몇 가지 차이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소설에서 '정수'와 아내는 주말부부이며, 재난을 당할 당시의 계절은 한여름이다. 아내가 사고 소식을 듣는 시점이 상이하며, 또한 외부에서 '정수'에게 영양분이 든 식수를 공급해주는 장면이 있다. '정수'는 라디오 채널에서 클래식 음악 뿐 아니라 뉴스 등의 소식도 일부 접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소설 속 '정수'의 아내는 도로공사, 경찰서 등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등 영화에서보다 서사적 비중이 훨씬 크다.
반면 영화가 개봉할 시기적 특성을 염두에 둔 것인지 영화는 주로 재난과 그 피해자 자체를 중심으로 하며 여기에 의도적으로 휴머니즘을 부여한다. 구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소설에서는 작품의 제3의 중심 인물로 설정돼 있는 '전문가'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되 '정수'와의 연락을 통해서 그 주된 존재 의미를 부여 받는 주변적 인물 '대경'으로 탈바꿈한 것은 명백히 '오달수'라는 배우가 가진 힘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게다가 영화의 초중반 등장하는 터널 안 또 다른 인물 '미나'(남지현)와 그녀의 개 '탱이'는 소설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미나'의 역할은 극한의 상황에서 '정수'가 그녀에게 물을 나눠주는 등의 행동을 통해 관계에서 오는 이타적 인간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혹은 관객에게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을지 가정해보게 만드는 인물일 뿐이다. 단지 소설에 없는 인물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미나'의 역할 자체가 영화에서는 서사의 전개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영화는 제한된 영양 공급에서 오는 체중 변화를 아예 드러내지 않으며 원작의 '정수'가 겪는 폐소 공포의 묘사를 상당 부분 생략해버릴 뿐 아니라, 아내 '세현'이 언론과 주변인들에 시달리면서 겪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난까지 대체로 생략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다룸으로써 상업영화로서의 유머 코드 등 안전하고 편의적인 각색에 치중한다. 동시에 사회고발 혹은 풍자적 장치들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탓에, 영화는 스스로 재난에 맞서는 사투로서의 이야기와 현실풍자적 우화 사이에서 명확한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다. 게다가 그 세태 풍자는 여타의 한국영화에서 익히 마주해왔고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터널>은 분명 재미있다. 또한 관객에게 현실의 진한 기시감을 남긴다. 그러나 하정우라는 얼굴이 관객의 몰입도를 유지할 뿐, 그것이 연출과 각본의 공은 아니다. 줄여 말하자면 영화 <터널>은 중요도가 낮은 순으로 많이 보여주는, 혹은 모든 것에 뚜렷한 중요도를 싣지 못한, 편의적이면서 안전한 각색의 결과물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잔혹한 현실을 다소 부담스레 인식한 탓에 <터널>은 영화 밖 현실과의 부자연스러운 연결을 시도할 뿐, 후반에 이르러 엉성한 봉합과 대리만족에 가까운 장면들을 전시해 그 서사의 완결성에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덧붙이자면 낙관과 희망을 소설과 달리 영화적 서사의 동력으로 삼으면서도, 배경에는 그와 상반되는 비관적 풍자들이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터널>은 재난 자체의 긴박감은 떨어지지만, 어쨌든 살얼음판에 놓인 한국사회의, 공분과 불안 위주의 초상을 담는다. (★ 5/10점.)
<터널>(2016), 김성훈
2016년 8월 10일 개봉, 126분, 12세 관람가.
출연: 하정우, 오달수, 배두나, 남지현, 정석용, 유승목, 박혁권, 이철민, 신정근, 예수정, 이한서, 이동진(목소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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