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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6. 2016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단조로움이 된다.

<아노말리사>(2015), 찰리 카우프만, 듀크 존슨

<아노말리사>에는 상황만 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결말을 맺는다. 시작부터 들려오는 불특정한 타인의 목소리들은 아마도 주인공 '마이크'(데이빗 듈리스)가 일상적으로 듣는 소리들일 것이다. 주인공을 3인칭으로 보여주되 1인칭으로 호흡하는 듯한 <아노말리사>의 목소리을 녹음한 배우는 단 세 명이다.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 그리고 나머지. 그런데 등장 인물은 세 명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명, 백 명 정도는 될 것이다. 지극히 찰리 카우프만 다운 착상과 그를 반영하는 각본이다. 이 정도면 이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그리고 관객이 듣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모두 똑같은 목소리겠구나.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 알 수 없는 계기와 상황으로 눈앞에 나타난 어떤 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특별해진다. 그것들 중 적어도 얼마만큼은 실제 상대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가 특별함을 부여해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호텔에서 처음 만난 '리사'(제니퍼 제이슨 리)가 싫어하고 가리고 싶어하는 얼굴의 상처를 '마이크'는 아름답다 말하며, 낮은 자존의 상태에 있는 '리사'의 언행들, 특히 목소리를 '마이크'는 아름답다 말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평범한 러브 스토리.



'마이크'는 그러나 고독함과 지루함 같은 것들에 찌들어 있는 인물이다. 출장 차 신시내티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그가 떠올리는 것은 아내도 아이도 아닌, 헤어진지 10년도 더 된 옛 애인과의 마지막이다. 급기야 '마이크'는 호텔 방에 앉아 전화번호부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건다. 그러나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리사'와의 사이에서도 '마이크'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이중적인 언행을 늘어놓는다. 고객을 대하는 서비스 정신에 대해 책을 쓰고 강의까지 하는 그는 특강에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을 이해하라" 말하지만 '리사'의 말투나 음식을 먹는 방식에 대해 간섭을 늘어놓는다. '리사'의 목소리가 마침내 영화의 시작부터 들려오던 다른 수많은 목소리들과 겹쳐지는 대목은 바로 거기서부터다. 이상한 꿈을 꾸고서 제대로 사태를 분간하지 못하는 그는 마침내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으로 돌아간다.



'마이크'를 호텔로 데려다주는 택시 기사와의 대화를 비롯해 '장난감' 가게, 마티니, 인형, 룸 서비스 등, 90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단순히 사실적인 스톱모션만 구현한 게 아니라 세부 장치들에 있어 <아노말리사>는 아주 충실하다. 그렇게 잘 짜여진 각본은 자연히 사람의 보편적인 불완전성과 어떤 착각들을 흩뿌려놓는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감정은, 사람은, 이해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현대인의 관계 속 단면을 일장춘몽처럼 헤집다가 영화는 그저 그렇게 끝난다. 특별함이라는 것은 마음의 유효기간이 정해놓은 허상이거나, 아니면 그저 마음 먹기에 달렸을 뿐 우리는 누구나 평범하고 비슷하거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한 인물은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게요." 우리는 매일 그렇게 수용하고 용인한다. 하나의 단조로움(A Normal)이 된다. (★ 9/10점.)



<아노말리사(Anomalisa, 2015)>, 찰리 카우프만, 듀크 존슨

2016년 3월 30일 (국내) 개봉, 90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데이빗 듈리스, 제니퍼 제이슨 리, 톰 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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