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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10. 2016

내적 딜레마를 겪는 순간의 고요하고 생생한 표정

<밀정>(2016), 김지운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과 같은 시대적 소재는 흔히 영화에서 "잊지 않겠습니다" 류의 감상(만)을 낳는 소비형 콘텐츠로 전락하곤 한다. 임진왜란도, 여타의 21세기 이후 한국 현대사의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다 하더라도, 이를테면 '독립군과 친일파'와 같은 지극히 단순한 구조에 배우의 존재감으로 영화의 결을 무마하곤 한다.



반면 워너브러더스가 제작과 투자에 관여한 첫 한국영화인 <밀정>은 그 접근 방식이 많이 다르다. 시종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는 '하시모토'(엄태구), '김우진'(공유), '정채산'(이병헌, 특별출연이지만 그 이상의 에너지를 뿝어낸다)보다 '이정출'(송강호)의 캐릭터가 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는 첩보물의 양상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와 직접적으로 관계 없이 결단의 순간에 놓인 인물 '이정출'이, 어떤 딜레마를 겪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에 있다. 1920년대 의열단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와 같은 것은 이 영화에서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너는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것 같냐?"


그래서 '이정출'의 이 한 마디가 <밀정>의 핵심이다. 외교/계몽/투쟁의 노선을 막론하고 '독립'의 희망이 점차 보이지 않기 시작하던 암흑의 시절. 누군가는 그럼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누군가는 기회를 노리고, 누군가는 적당히 삶의 방식을 찾는다. 이러한 시대적 공기를 바탕으로 <밀정>은 극한의 상황에서 제한된 환경과 한정된 인물들이 기능하는, 다음 장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다볼 수 없는 서스펜스를 일정 부분 포기한다. 누구나 '밀정'이 될 수 있었던 시대에 "그는 왜 밀정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 그 저변에 '이정출'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히가시' 부장(츠루미 신고)으로부터 의열단의 은밀한 자금 조달책으로 활동하는 핵심 인물 '김우진'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내라는 지시를 받고, 동시에 의열단장 '정채산'으로부터 일본 경찰의 정보를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중 밀정'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뚜렷하고 확고한 신념과 뜻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것은 '어쩌다 보니'인 것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상황에 맞는 선택을 내려왔던 그가 '김우진'을 만난 후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밀정>의 결말로 향하게 된다. 그러니 외면상 냉철한 스파이 장르물처럼 보였던 <밀정>은 자연스레 인물의 뜨거운 내면을 꺼내 관객에게 던져 놓는다.


자연스레 서사를 따라가는 관객에게 분위기와 인물 위주의 <밀정>은 조금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만들어진 극영화를 스크린으로 만날 때 그 영화가 얼마나 관객과 가까이 호흡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끌어다 놓는지를 생각할 때 영화의 성취는 정말로 그 시대에 다녀온 것처럼 생생한 공기를 불어넣는다는 데에 있다. '정채산'의 목소리를 빌어 역사가 지금껏 어떻게 앞으로 나아갔꼬 나아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 또한 적절한 양념이자 디저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높은 긴장감을 주는 장면은 모두 둘 혹은 셋의 인물이 서로의 속내를 드러낼 듯 말 듯 '대화'하는 장면들이다.


시대가, 혹은 타인이 우리를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도록 붙잡고 이끌 때, 그 열차에 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 과정에서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고요하고도 격렬한 변화들. <밀정>은 그 순간의 표정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 8/10점.)



<밀정(The Age of Shadows, 2016)>, 김지운

2016년 9월 7일 개봉, 140분, 15세 관람가.


출연: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허성태, 츠루미 신고, 이병헌, 박희순, 김동영, 서영주, 남문철 등.



덧,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물론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기대'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된 것. 기대치를 낮춘다는 것은 종종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영화를 보면서는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단순히 수치로만 따지면,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9점 이상을 준 것은 2015년에는 <소수의견>이 유일했다. 2016년은 <곡성> 뿐이었다. 8점으로 내려보면 <동주>가 있었다. 말하자면 <밀정>은 <곡성> 이후 내게 처음 나타난, 다시 보고 싶은 한국영화였다. 그러니 <밀정>은 꽤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그러나 '나홍진', '김지운' 같은, 극소수의 감독에게서만 가능한 일일까. 조금은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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