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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31. 2023

혼자서는 볼 수 없는 것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2009)

존 리 행콕 감독의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2009)는 좋은 신체 조건과 운동 신경을 갖고 있지만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와 길에서 우연히 그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오는 ‘리 앤 투오이’(산드러 불럭)를 주인공으로 한 실화 바탕의 작품이다. ‘마이클’이 흑인이고 ‘리 앤’이 백인이라는 점 때문에 얼핏 <헬프>(2011)나 <그린 북>(2018)과 비슷한 소재나 메시지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블라인드 사이드>는 타고난 인종보다는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는 삶의 환경을 더 중요하게 말하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영화 첫 장면은 ‘리 앤’의 내레이션과 함께 실제 미식축구 방송 중계 화면으로 시작된다. 1985년 11월, 워싱턴 레드스킨스와 뉴욕 자이언츠 경기에서 자이언츠 수비수 ‘로렌스 테일러’가 레드스킨스의 쿼터백 ‘조 타이스만’을 뒤에서 덮쳤는데 타이스만은 테일러를 보지 못했고, 뒤로 넘어지는 과정에서 오른발에 심한 골절상을 입는다. 타이스만의 부상은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고, 이 일로 미식축구계는 쿼터백의 시야 사각지대인 ‘블라인드 사이드’로부터 침입해오는 상대편 수비수를 막을 포지션인 ‘태클’의 역할을 강화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마이클’이 바로 이 ‘태클’ 포지션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갖췄다. 돌진해오는 수비수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체격과 유연한 운동신경,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보호하는 본능적인 감각까지.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스틸컷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라는 제목은 그래서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리 앤’이 ‘마이클’을 외면하지 못한 건 자신의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마이클’이 학업 성적이 부진해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머물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업가인 ‘리 앤’의 가족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기본적인 것조차 ‘마이클’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고, 처음에는 하룻밤만 재워주기로 했지만 ‘리 앤’과 가족들은 조금씩 ‘마이클’을 가족처럼 보듬는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기독교 집안이자 상류층이라는 ‘리 앤’ 가족의 환경적 정체성을 ‘마이클’의 그것과 애써 대비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리 앤’이 ‘마이클’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과 ‘마이클’이 ‘리 앤’의 가정에서 친밀감을 느끼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포개어놓는 방식으로 누군가 내미는 손길이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 후반에 이르러 ‘리 앤’이 ‘마이클’을 도와준 행위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이야기가 지닌 보편적이고 잔잔한 감동을 잃지 않는다. 선한 마음을 지닌 ‘리 앤’ 가족의 구성원들 각자의 캐릭터에도 개성을 담아내며 무엇보다 산드라 불럭이 연기한 ‘리 앤’이 영화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내면적 변화를 세심하게 표현해낸다. (산드라 불록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했다.)


북미 지역에서만 순 제작비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였을 만큼 <블라인드 사이드>는 추운 연말에 제법 어울리는 가족 드라마다. 영화 속 주요 배역의 인종이나 사회적 계급이 대비된다고 해서 그 영화가 반드시 인종 문제나 계급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연출하고 각색을 한 존 리 행콕 감독은 <세이빙 MR. 뱅크스>(2013)나 <파운더>(2016)처럼 실화 바탕의 이야기에 특히 강점을 지닌 감독이기도 한데, <블라인드 사이드>는 전적으로 그 바탕이 되는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좋은 에너지를 잘 뽑아낸 드라마다.


선하고 환한 이야기가 지닌 좋은 영향력, 그것이 보지 못했던 면을 알게 하고 알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한다. 최근 읽은 어떤 책에 관하여 쓴 후기 제목을 ‘뻔하지 않은 이야기만 가치 있는 건 아니어서’라고 지은 적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평소에 보지 못하는 많은 면은 그가 잘 알고 있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로부터 나오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선뜻 내미는 손길은 용기로 시작해 온기로 돌아온다. (2019.11.18.)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국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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