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계절과 날씨 모두를 잊기 좋은 공간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시간은 극장 밖의 많은 것들로부터 거리 두기 알맞다. 지금처럼 추운 날씨일수록 극장 안과 밖의 온도차를 피부로 느낀다. 그 차이를 체감하는 매 순간은 곧 우리가 삶의 여러 경험과 자극을 빨아들이며 과거와 미래 사이의 달라진 ‘현재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좋은 이야기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경험한 삶을 살게 된 우리는 이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추천하고 싶은 영화들의 이름을 떠올리다 이렇게 서론을 연다.
지난 2023년 11월호에서도 이 지면을 빌어 우리 앞에 다음 계절을 위해 힘과 마음을 비축하는 시기가 다가와 있다고 영화 <쉘부르의 우산>(1964)을 다뤘고, 2023년 1월호에서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2006)에 빗대어 “움츠러들지 않는 겨울나기”에 대하여 쓴 바 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이 시간은 언제나 지나간 겨울과 새로운 겨울의 사이다. 그래서 더 힘주어 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새해가 되었다고 갑자기 작년과 판이하게 다른 ‘극적인’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 앞에는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속 ‘파이’가 만나는 거대한 폭풍과 파도처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학교나 직장에서는 영화 <캐롤>(2015) 속 ‘캐롤’과 ‘테레즈’가 겪는 일처럼 누군가로부터 스스로를 부정당하거나 혹은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격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일을 당겨 꺼내는 게 아니라, 좋은 일로만 인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비하는 말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는 화물선이 난파된 뒤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아슬아슬한 동거를 이어가던 중 또다시 폭풍을 만나 그나마 비축했던 식량과 생존의 희망은 물론 하루하루를 연필로 기록 중이던 노트마저 손에서 놓쳐 버린다. 자신은 이미 모든 걸 내던졌고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며,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더 원하느냐”라며 천둥 번개 치는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누군가에게 구조되리라는 가능성도 이미 수십 번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밤을 지나며 떠나보낸 뒤 거듭 찾아온 재난의 앞에서 파이는 오히려 더 또렷하게 외친다. 어디 덤벼보라는 듯이. 이 영화는 거대하고 낯선 이야기를 만나는 관객에게 어떤 선택(또 다른 시점에서 파이는 누군가에게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두 갈래로 들려준 뒤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다)을 할 것인지에 삶이 달려있다고 말한다.
반면 <캐롤>에서는 화물선이 뒤집힐 만큼의 대형 재난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배경은 캐롤이 백화점에서 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고 테레즈가 필름 카메라로 겨울 뉴욕 시내 곳곳의 풍경을 무심히 담는 연말연시다. 캐롤은 남편과 이혼 조정을 하며 딸 린디의 양육권을 둘러싸고 지난한 갈등을 겪는 동시에 테레즈와의 관계로 인해 의심과 미행에 시달린다. 테레즈 또한 캐롤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랑과 이별의 아픔에 지쳐간다. 그러나 테레즈는 자신을 몰아붙이던 이를 향해 “평생 오늘처럼 맨 정신인 적이 없었다”라며 본인의 선택이 충동이 아님을 강조한다. 앞선 영화 장면들에서 그가 점심 메뉴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거나 캐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이성 친구의 선 넘는 행동에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등의 소극적 모습을 보인 뒤의 일이다.
영화 '캐롤' 스틸컷
요컨대 도저히 사람이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폭풍을 주인공에게 재난처럼 퍼붓는 <라이프 오브 파이>도, 어느 날 우연히 시작된 낯선 관계가 주인공의 내면을 뒤흔들고 삶의 관점을 뒤바꾸는 <캐롤>도, 생의 기로에 선 인물을 조명하거나 선택의 순간 인물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며 관객에게 생생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들이다. 그들이 어떤 순간에 하늘을 똑바로 올려다보거나 전에 없던 단호함이나 결연함을 가질 수 있는 건, 벌어질 일을 결말을 아는 관객처럼 내다보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환경에 스스로를 위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태어났다. 2024년에도 우리는 뚜벅뚜벅, 당당히 걸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다음 대사를 고민하며 걸어 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살아 있는 무대의 빛 속으로'
-이현호, 「살아 있는 무대」,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에서(문학동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