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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05. 2024

“평생 오늘처럼 맨 정신인 적이 없었어”라며 맞는 겨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와 '캐롤'(2015)

극장은 계절과 날씨 모두를 잊기 좋은 공간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시간은 극장 밖의 많은 것들로부터 거리 두기 알맞다. 지금처럼 추운 날씨일수록 극장 안과 밖의 온도차를 피부로 느낀다. 그 차이를 체감하는 매 순간은 곧 우리가 삶의 여러 경험과 자극을 빨아들이며 과거와 미래 사이의 달라진 ‘현재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좋은 이야기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경험한 삶을 살게 된 우리는 이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추천하고 싶은 영화들의 이름을 떠올리다 이렇게 서론을 연다.


지난 2023년 11월호에서도 이 지면을 빌어 우리 앞에 다음 계절을 위해 힘과 마음을 비축하는 시기가 다가와 있다고 영화 <쉘부르의 우산>(1964)을 다뤘고, 2023년 1월호에서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2006)에 빗대어 “움츠러들지 않는 겨울나기”에 대하여 쓴 바 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이 시간은 언제나 지나간 겨울과 새로운 겨울의 사이다. 그래서 더 힘주어 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스틸컷


새해가 되었다고 갑자기 작년과 판이하게 다른 ‘극적인’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 앞에는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속 ‘파이’가 만나는 거대한 폭풍과 파도처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학교나 직장에서는 영화 <캐롤>(2015) 속 ‘캐롤’과 ‘테레즈’가 겪는 일처럼 누군가로부터 스스로를 부정당하거나 혹은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격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일을 당겨 꺼내는 게 아니라, 좋은 일로만 인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비하는 말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는 화물선이 난파된 뒤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아슬아슬한 동거를 이어가던 중 또다시 폭풍을 만나 그나마 비축했던 식량과 생존의 희망은 물론 하루하루를 연필로 기록 중이던 노트마저 손에서 놓쳐 버린다. 자신은 이미 모든 걸 내던졌고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며,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더 원하느냐”라며 천둥 번개 치는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누군가에게 구조되리라는 가능성도 이미 수십 번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밤을 지나며 떠나보낸 뒤 거듭 찾아온 재난의 앞에서 파이는 오히려 더 또렷하게 외친다. 어디 덤벼보라는 듯이. 이 영화는 거대하고 낯선 이야기를 만나는 관객에게 어떤 선택(또 다른 시점에서 파이는 누군가에게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두 갈래로 들려준 뒤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다)을 할 것인지에 삶이 달려있다고 말한다.


반면 <캐롤>에서는 화물선이 뒤집힐 만큼의 대형 재난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배경은 캐롤이 백화점에서 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고 테레즈가 필름 카메라로 겨울 뉴욕 시내 곳곳의 풍경을 무심히 담는 연말연시다. 캐롤은 남편과 이혼 조정을 하며 딸 린디의 양육권을 둘러싸고 지난한 갈등을 겪는 동시에 테레즈와의 관계로 인해 의심과 미행에 시달린다. 테레즈 또한 캐롤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랑과 이별의 아픔에 지쳐간다. 그러나 테레즈는 자신을 몰아붙이던 이를 향해 “평생 오늘처럼 맨 정신인 적이 없었다”라며 본인의 선택이 충동이 아님을 강조한다. 앞선 영화 장면들에서 그가 점심 메뉴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거나 캐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이성 친구의 선 넘는 행동에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등의 소극적 모습을 보인 뒤의 일이다.


영화 '캐롤' 스틸컷


요컨대 도저히 사람이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폭풍을 주인공에게 재난처럼 퍼붓는 <라이프 오브 파이>도, 어느 날 우연히 시작된 낯선 관계가 주인공의 내면을 뒤흔들고 삶의 관점을 뒤바꾸는 <캐롤>도, 생의 기로에 선 인물을 조명하거나 선택의 순간 인물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며 관객에게 생생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들이다. 그들이 어떤 순간에 하늘을 똑바로 올려다보거나 전에 없던 단호함이나 결연함을 가질 수 있는 건, 벌어질 일을 결말을 아는 관객처럼 내다보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환경에 스스로를 위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태어났다. 2024년에도 우리는 뚜벅뚜벅, 당당히 걸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다음 대사를 고민하며
걸어 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살아 있는 무대의
빛 속으로'

-이현호, 「살아 있는 무대」,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에서(문학동네, 2018)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국내 포스터(좌), 영화 '캐롤' 국내 포스터(우)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4년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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