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다 지나보낸 영화들에 대해서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수 백, 수 천 편의 영화를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 대강의 흐름과 맥락을 떠올리고 장면들의 집합체가 안겨주었던 느낌을 기억할 따름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영화를 다시 붙잡아 내리는 건 삶과 마찬가지로 가능할 리가 없고 ‘우리’는 다만 내일의 영화를 향해 나아갈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어떤 영화 한 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걸 영화에 안부를 묻는 일이라고 해보겠다
최근 CGV에서 열린 ‘서치라이트 기획전’ 덕분에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노매드랜드>(2020)를 극장에서 (다섯 번째로) 관람했다. 그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2021년 5월에는 이렇게 썼다. “‘내 인생의 영화’처럼 특별한 이 시네마의 순간과 이 경이로움도 거기 먼지가 조금씩 쌓이고 그 자리를 다른 영화들이 조금씩 대체해나가는 일을 막지는 못한다“ 한 영화를 다시 관람한다 해도 그 사이에는 영화를 보기 전과 후의 ‘나’가 각각 개입한다. 나날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금씩 성장 혹은 성찰해나간다고 본다면 결국 온전히 똑같은 영화를 만나는 일은 오직 한순간만 가능하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집이나 가족을 잃은 채 캠핑카를 타고 미국 각지를 유랑하며 계절성 노동을하며 살게 된 사람들이 <노매드랜드>의 주인공이다.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쓰인 영화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본인’이다. 그들 사이를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가공의 인물 ‘펀’이 지나며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겪는다. 혼자 사는 중년의 여성들이 대부분인 ‘노매드’들은 밴에 깔린 작은 침대에서 밤을 보내며 저마다의 생활을 감당하지만 이따금 생활의 지혜를 공유하며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공장이나 농장, 물류창고, 캠핑장 등 한시적인 근로를 마치며 그들은 밥벌이를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선다.
노매드들의 유랑 생활에 있어 여러가지 팁과 도움을 제공해주는 인물인 ‘밥 웰스’는 영화 중반 ‘펀’과 각자의 사연을 주고 받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대한 감회를 나눈다. 과거에 매여 있던 ‘펀’은 “기억만 하느라 생을 허비한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는데 그 이야기를 듣던 ‘밥’이 해주는 말은 우리에게 헤어짐에 대해 일말의 용기와 희망을 준다. “There is no final goodbye.” 영원한 헤어짐은 없고 우리는 언제 어디에선가 문득 혹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말이다. 노매드들 중 누군가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긴 유랑을 끝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작년에 새해 인사를 했던 동료가 올해에는 보이지 않기도 하고, 그렇게 그들은 다음 여정을 향해 떠나는 동료들에게 매 계절마다 인사를 건넨다.
<노매드랜드>는 그렇게 내게 지난 영화들에게 안부를 묻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흘러가거나 변화하고 또 점차 성장하거나 발전하기도 하므로 온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만을 바랄 수는 없겠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삶이 흘러가는 동안 나를 스쳐갔던 것들과 이미 내게 스민 것들 하나하나 또한 새로운 의미를 나날이 획득하기도 한다. 영화 속 ‘펀’이 남편을 기억하듯, “기억되는 한 살아 있는” 것들이 마음 속에서 끝 모를 멀티버스를 형성한 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상상한다. 아직 다 기억하지 못한 영화들 투성이지만 그들 하나하나에게 이렇게 안부를 띄운다. “See you down the r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