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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18. 2023

스타는 사라져도 영화는 그 자리에 남아 계속된다

영화 '바빌론'(2023) 리뷰

이제는 무엇도 아닌 한 낡은 사람이 홀로 영화관에 앉아 빛이 쏘아지는 화면을 응시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1952)를 보면서 그의 시야에는 지나온 삶의 모든 것들이 보인다. 그들 중 많은 것들은 그저 상영되지 못한 영화였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화들이었다. 영화는 그저 값싼 구경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진심으로 이상과 예술을 꿈꾸었고 또 그들 중 그 낡은 사람을 비롯한 누군가는 현실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그 세계 자체를 동경했다. 될 수 있는 그 세계는 동시에 지금 자신이 (세계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기 딱 좋은, 냄새나고 더럽고 허약한 토양 위에 있기도 했다.


영화 '바빌론' 스틸컷


<바빌론>(2023)의 '넬리'도, '매니'도, 그리고 '잭'도 일면 비슷한 종류의 '영화하는 마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리 없는 것들에도 이야기는 있었고 그들은 각자 타고난 방식으로 얼마 동안 스타로서 빛을 내거나 혹은 그 잔영을 만들어내는 현장에 있었다. 스타는 겉으로만 화려하고 속으로는 대중들에게 업계 관계자들에게 평가받거나 대상화되는 약자의 위치에 있기 쉽다. 불과 수십 년 뒤면 그들은 대부분 잊힌다. <바빌론> 속 그들도 조용히 어둠 속으로 퇴장하거나 무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추억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바빌론>의 시선은 저 낡은 사람의 일렁이는 두 눈을 빌려 그 자리에 <터미네이터 2>(1991)나 <아바타>(2009) 등과 같은 현대의 것들, 그러니까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살아 있지 않은 시대의 산물을 포개어 놓는다. 곧 스타는 사라져도 영화는 그 자리에 남아 계속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무성영화를 지나 유성영화를 거쳐, 곧이어 TV 시대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 고상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세계 위에서 저마다 존재하기 위해 분투했던 영화판 사람들의 활극을 보는 동안 내게 기억에 남은 건 앞에서 쓴 '매니의 영화'만큼이나 영화관 안에서 '자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보는' 넬리와 잭의 시선이기도 했다. (어떤 장면에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에서 샤론 테이트가 자기 영화 <렉킹 크루>(1969)를 보는 대목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촬영 현장에서나 영화인이지 영화관에서는 그들도 단지 관객일 뿐이구나.


영화 '바빌론' 스틸컷


현장에서의 협업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는 건 꼭 우리 삶과 닮았다. 배역을 맡으려던 이가 갑자기 사고가 나 대신 그 자리를 꿰차게 된 뒤 반짝 스타가 된 이의 이야기도, 유성영화 시대에 적응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그 흐름과 변화를 뒤따르지 못하고 점차 쇠락했던 이의 이야기도, 그리고 근사하지도 않고 돋보이지도 않지만 같은 시대에 파티장을 기웃거리고 영화관 안에서 킬킬거렸을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뒷모습도.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오규원, 「용산에서」) 그래서 별 달리 대단할 것도 없는 우리의 일상에도 이따금 영화 한 편쯤은 있는 것이고.


https://brunch.co.kr/@cosmos-j/1009


영화 '바빌론' 국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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