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2023) 리뷰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의 초반부 기억에 남았던 대화 중 한 대목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아쓰시는 반에서 기르던 토끼가 병으로 죽어 방과 후 친구가 토끼한테 다 같이 편지를 쓰자고 했는데 어차피 읽어줄 토끼가 없으니 그 편지가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고 한다. 죽은 토끼를 보고 왜 웃었냐는 료타의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런가 하면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의 스즈도 일찍 상실을 겪고 이복 자매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 인물이다. <어느 가족>(2018)이나 <브로커>(2022) 등과 같은 영화들에서도 어떤 아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을 감내하거나 또래보다 일찍 성숙하게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괴물>(2023)에서도 중심인물인 ‘미나토’와 ‘요리’ 모두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동시에 타인에게 속내를 털어놓기 어렵거나 혹은 편견(“아빠 없이 자라서 그렇다” 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만 <괴물>은 아이의 일상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대신 엄마를 비롯한 어른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다. (<괴물>은 총 3개의 시점에서 나란히 혹은 번갈아 펼쳐진다.) '미나토'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한 엄마 '시오리'는 학교를 찾아가고,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담임교사인 '호리'가 미나토에게 손찌검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괴물>의 초반부에서 나타나는 학교 관계자들의 말이나 행동은 마치 무슨 일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엄마의 시각에서) 잘 납득되지 않는 태도를 내보이기도 한다. 그건 호리 선생님은 물론 교장을 비롯한 다른 학교 사람들, 그리고 교내에서 스치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이야기의 중심은 '미나토'에게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것의 원인 혹은 책임은 누구에게서 비롯하였는지 밝혀내는 게 과제가 될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화자 혹은 관찰자는 시오리가 아니라 호리로 전환되고, 거기에 미나토와 같은 반 학우인 요리가 개입하면서 <괴물>의 흐름은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작중 누군가는 진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미나토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괴물>은 걷는 듯 천천히, 그리고 같은 하루를 다른 각도에서 되풀이해가며 아이들의 곁으로 점차 다가간다.
미나토와 요리가 흥얼거리는 “괴물은 누구게?”라는 노랫말이 마치 영화 속에서 ‘괴물’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거나 목표인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연출도 각본도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보고 난 뒤 관객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찾아내려 했던 작정을 접고 다만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두 소년이 맞이한 햇살이 너무 짧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를 들으며 맞는 엔딩크레디트가 조금 천천히 지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상영관에 앉아 있었다.
<괴물>(怪物,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3년 11월 29일 (국내) 개봉, 126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안도 사쿠라, 나가야마 에이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타카하타 미츠키, 카쿠타 아키히로, 나카무라 시도, 타나카 유코 등.
수입: (주)미디어캐슬
배급: NEW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들 리뷰 모음:
https://brunch.co.kr/@cosmos-j/140
<환상의 빛>(1995)
https://brunch.co.kr/@cosmos-j/1293
<걸어도 걸어도>(2008)
https://brunch.co.kr/@cosmos-j/249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https://brunch.co.kr/@cosmos-j/319
<어느 가족>(2018)
https://brunch.co.kr/@cosmos-j/1428
<브로커>(2022)
https://brunch.co.kr/@cosmos-j/1487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