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모두에게는, 함께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가족'이 아니어도, 함께이길 택한 사람이라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가 '지나간 과거도 다른 공간, 다른 사람으로 인해 어쩌면 조금 달리 쓰일 수 있다는 성숙한 관찰의 기록'이었다면, <어느 가족>(2018)은 다른 공간이나 다른 사람으로서가 아닌, 삶의 오늘 그 자체를 조금 더 면밀하고 긴요하게 관찰한다. 아니, 관찰보다는 응시라는 말이 좋겠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나마 '스즈'(히로세 스즈)의 이야기와 시점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면 <어느 가족>은 바로 이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들 각자의 일상들이 연대기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특정한 누군가가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인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각자의 생계와 일상을 따로 또는 함께 이어가는 '가족' 모두가 곧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이야기 흐름이 사건 중심이 아니며 인과 관계 중심도 아니라는 점은 균형과 거리를 훌륭하게 알고 지키는 장점이 된다. 그로 인해 과연 이들이 공존할 수 있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인지에 주목하게 되며 이 사람들이 무슨 사연을 지니고 있는지보다는 이들이 지금 먹고 마시는 음식과 나누는 대화가 어떤 공기를 만들어 집이라는 공간을 채워가는지를, 조용히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에는 그 어떤 가치판단도 개입되지 않는다. 사실상 경제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하츠에'(키키 키린)의 연금이 나오는 출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지 않으며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업소에서 성적 노동을 한다는 것 역시 단지 생계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쇼타'(죠 카이리)가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행위 역시 이 영화에서는 범죄라기보다 생계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언급하는 게 새삼스러울 만큼 당연한 사실이지만, <어느 가족>이 이들의 '도둑질'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미화의 시도를 한다고 볼 여지는 없다.) 오로지 고로케와 소바 같은 음식들, 시장 거리를 걸으며 마시는 소다 음료, 함께 놀러 가 보는 해변의 파도, 그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단란한 일상에 집중할 때 영화는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해 아무런 말도 발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무언의 감정과 힘을 지니게 된다.
이제는 그의 영화를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특정한 인물의 사연에 마음을 기울이며 그 삶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주목했다면, <어느 가족>은 지금껏 목격한 가장 사려 깊고 생생한 응시의 드라마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인물이 아니라 곧 삶 자체가 바라봄의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쇼타'에 의해 어떤 사건 하나가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조차도 사건이라기보다는 그저 일어난 일 정도라 해야 할 것이며, 이 균열 역시 어떤 메시지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어느 가족>의 사람들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거기 살고 있었고, 영화는 그 삶의 일부를 가만히 담았으며, 영화가 끝나고도 그 삶들의 일상은 아주 같은 방식일 수는 없지만 조용히 이어진다. 이어질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족이 가족일 수 있는 것은, 혈연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되거나 무게가 된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여러 영화들이 혈연이 아닌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낸 것처럼, <어느 가족> 역시,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보편적인 일상을 포착한다. 태어나보니 함께임을 발견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함께이기를 택한 사람들이 공동의 삶을 꾸려가는 이야기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우리가 지금껏 정립해온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족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같이 있음으로 인해 웃을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만드는 기억은 곧 가족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고.
그럼에도 남는 질문. 그들의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이제 그들은 어떻게 될까. 영화가 하려 하지 않았고 굳이 할 의도도 없었을 답을 내리자면 아마 이런 것이다. 친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같이 누리는 행복은 행복이 아닌 것일까? 이들은 그저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손가락질받아야 하는가? 나눠 먹는 밥상, 함께 구경하는 풍경, 같이 걷는 길, 그것들이 주는 소박한 즐거움은 사회가 '가족'이라고 규정한 이들에게만 허락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어느 가족>은 사회 안전망의 법과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들을 주된 응시의 대상으로 하지만,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영화의 언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난 후 관객으로부터 자연히 나오는 것일 테다. 다만 가족의 존재에 대하여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쇼타'와 '유리'(사사키 미유)의 눈빛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눈은 분명 마음이 하지 못한 소리들을 조용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고로케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건 분명 같이 먹으며 맛있다고 호호 불며 웃는, 그 순간을 좋아하는 것이었으리라.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 9/10점.)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년 7월 26일 국내 개봉, 121분, 15세 관람가.
출연: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마츠오카 마유, 키키 키린, 죠 카이리, 사사키 미유 등.
수입/배급: 티캐스트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2018.07.17 씨네큐브 광화문)
*<어느 가족> 국내 메인 예고편: (링크)
"연출은 연기 지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독이 열 명 있으면 열 가지가 존재하는 애매한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 목표로 하는 한 가지만은 명쾌하다. 영화 속에 그려진 날의 전날에도 다음날에도 그 사람들이 거기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관을 나온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줄거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내일을 상상하고 싶게 하는 묘사. 그 때문에 연출도 각본도 편집도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120쪽,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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