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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14. 2016

세상 모든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

<환상의 빛>(1995),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떤 감독의 작품을 극장에서 처음으로 접할 때 그것을 그의 데뷔작을 통해서 행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꽤나 가치 있는 일이다. 내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그렇다. 아마도 그는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면서 비슷하거나 연장선상에 있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되, 형식에 있어서는 조금씩 자유로움 내지는 개방성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 느낀 것은 <환상의 빛>이 영화적으로는 잘 통제되어 있고 형식미를 중시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많은 장면에서 인물은 프레임의 안쪽에 놓여 있고 카메라는 정적이며 긴 호흡으로 일관한다. 그 철저히 짜여진 형식 속에 전하고자 하는 바는 굳이 힘을 싣지 않고 관객이 마음을 깊이 기울이면 살짝 보일 만큼만 담아놓았다. 사건보다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난 후의 그 파장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작품으로 영화 전체를 통틀어 특정한 일이 일어난다기보다는 그저 한 가족 혹은 한 인물을 고요하게 관찰하는 편에 가깝다.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가만히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영화인 것이다. 몇몇 장면은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영화를 보고 있다기보다 여행을 떠나온 기분을 주고, 음악으로 많은 말을 대신 하기도 한다. <환상의 빛>의 빛에는 그래서 '환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정말 분명한 언어로 입에서 입으로 말을 전하는 것 -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빛을 전하는 것 - 이 아니라 눈빛으로 넌지시 흘리는 것이다. 가끔은 어떤 사람에게'만' 찾아가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유미코'(에스미 마키코)가 겪는 일은 그래서 '왜'가 결여돼 있다. 하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은 일은 언제든 바로 내게 찾아온다. 그 일은 나 때문에 벌어졌다, 싶은 일은 실상은 그저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행해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이유와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은 그냥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가 우리의 삶에서는 기어코 찾아온다. 마침내 그 흐름은 삶의 일부로 자리한다.



죽음 역시도 마찬가지다. '유미코'의 남편이 왜 그런 선택을 행하는지 '유미코'는 영화 후반에 가서야 "대체 왜"하고 토로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영화는 별로 그것에 관심이 없다. "왜 막지 못했을까"라 말하는 어릴 적 그녀를 통해 우리는 그런 일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깨닫는다. 과거에서 미래로 일방적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우리의 삶의 섭리는 그런 점에서는 공평하다. 자신이 도저히 막아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또한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합치되는 아름다운 모습 역시, 보기 쉽지 않지만 정말 가치 있다. 그런 영화는 굳이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자신을 기울이게 만든다. (★ 8/10점.)



<환상의 빛(幻の光, Maborosi , 1995)>,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6년 7월 7일 (국내) 개봉, 109분, 15세 관람가.


출연: 에스미 마키코, 나이토 타카시, 아사노 타다노부, 카시야마 고키, 와타나베 나오미, 에모토 아키라, 요시노 사야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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