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클린'(2015) 리뷰
내게 ‘특정한 형태나 풍경’으로 가장 또렷하게 각인된 달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그 답은 3월이다. 절기상으로는 경칩과 춘분이 있는 달.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달. 회사들은 전년도 결산을 마치고, 직장인들은 연말정산이 반영된 급여를 지급받거나 연봉 협상을 마치는 달. 심리적으로는 아직은 조금 쌀쌀하거나 가끔 춥지만 이제는 겨울이 끝났다고 체감하는 달이다. 시작을 다루는 영화는 많지만 이 겨울과 봄 사이를 가장 입체적이고 섬세하게 지나가는 작품을 말할 때 손꼽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브루클린>(2015)이다.
1950년대 아일랜드의 소도시 에니스코시에서 나고 자란 에일리스(시얼샤 로넌)는 한 신부의 주선으로 미국 뉴욕에 있는 백화점에서 일하며 낮에는 야간 대학에서 회계를 공부하게 된다. 아일랜드인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에서 지내지만 고향 생각에 쉽사리 새 터전에 정을 붙이지 못하던 에일리스는 한 댄스파티에서 이탈리아인 청년 토니(에모리 코헨)를 만나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던 사이 떠나온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에일리스의 일상에는 여러 변화가 물든다.
에일리스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이다.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에 “아직도 언니와 엄마가 많이 그립긴 하지만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백화점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두꺼운 외투를 겹겹 입은 채 여객선에 오르며 지독한 배 멀미에 시달려야 했지만 영화 중반 에일리스의 일상에 자리하는 이미지는 뉴욕의 전형적인 가정집들이 늘어선 풍경과 함께 한층 밝고 여유 있게 된 그의 표정이다.
이 변화는 원경의 브루클린 브리지를 배경으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자마자 행인들 틈에서 걸음을 재촉하던 에일리스의 첫 번째 겨울과 대비된다. 에일리스의 평소 의상도 초록색과 노란색을 기본으로 삼은 생동감 있는 배색으로 첫 번째 봄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에일리스의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먼저 말할 것은 일생에 또 추운 계절이 얼마간은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영화 속 에피소드들이다. 예를 들어 뉴욕 정착 초기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에일리스를 응원하던 언니 로즈가 영화 중반 병으로 사망하고, 에일리스는 홀로 남은 엄마의 곁에서 언니의 장례 후 집안 뒷정리 등을 돕기 위해 한동안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거나 예상치 못한 선택의 기로에 부딪히게 된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뉴욕 생활을 몇 계절 건넌 뒤 (고향 일정을 마치고) 다시 새로운 터전이 된 브루클린으로 향하는 에일리스의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같은 선실을 쓰게 된 또 다른 이민 여성에게 입국 심사대에서의 행동 요령 등을 조언해 주는 장면은 바로 그 자신이 배 멀미를 하고 (익명의 또 다른 여성으로부터) 화장법이나 옷차림 등 팁을 전수받던 정착 초기의 에피소드와 대응된다. 낯선 터전에서 정착하는 일에 인간관계가 정서적 차원에서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브루클린>은 “처음에는 오래 걸리지만 그러다 금방 받게 돼”라는 편지의 체감 수령 기간에 대한 언급과 같이 일생의 계절감에 관한 묘사가 영화 속 에일리스의 성장과 대응되는 빛나는 각색으로 가득한 영화다.
콜럼 토빈의 원작 소설에서 작가는 앞에서 말한 에일리스의 현재와 미래를 (순서를 바꿔) 이렇게 묘사한다. “브루클린에서 두 번의 추운 겨울과 힘들었던 숱한 나날에 맞서 싸우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졌던 한 사람과, 어머니의 딸로서 모두가 아는, 아니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또 한 사람.”(『브루클린』,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2011, 312쪽) 전자는 전에 없던 미래이자 이제는 새로운 현재라 할 수 있는 에일리스의 모습이며, 후자는 떠나왔지만 지금 정체성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인 유년의 모습이다.
첫 뉴욕행 배를 타기 전 언니 로즈가 “신발이 자리를 차지할 거야”라며 세심하게 에일리스의 짐 정리를 도와주는 대목이 있다. 가방에 들어갈 수 있는 수하물의 무게나 부피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두꺼운 코트 대신 점차 가벼운 재킷이나 카디건을 입기 시작하는 봄의 변화는 우리 각자의 가방에 아직 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채울 기회를 준다. 에일리스가 뉴욕에서 맞는 봄을 떠올리며 내가 다녀간 몇 해 전 뉴욕 풍경을, 그리고 아직 겪지 못한 새로운 봄을 겹쳐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