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여운 것들'(2023) 리뷰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이병률, ‘사랑의 역사’ 부분,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과학자이자 외과의사인 고드윈(윌렘 대포)에 의해 어느 괴팍한 성주의 아내였으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던 빅토리아(엠마 스톤)는 벨라(엠마 스톤)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정확히는, 몸은 완전히 죽지는 않은 채였던 상태의 그에게 고드윈은 아기의 뇌를 '이식'한다. 고드윈의 연구실이자 거처에는 이미 '오리개'(duck dog) 등과 같이 수술로 탄생한 합성된 생물들이 거닐고 있었다. 벨라도 단지 그중 하나였지만, 성인의 몸과 아이의 정신을 갖게 된 벨라는 나날이 학습을 거듭하고 태어난 공간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의 모험을 원하기 시작한다. 단지 지리적 인식의 토대를 넓히는 것만이 아닌, 스스로의 욕구와 존재론적 자아 탐구에 대해서도 물론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 영화 <가여운 것들>(2023)은 해석된 관찰자의 시선에서 규칙, 즉 나를 뺀 세상의 바깥에 이미 존재해 온 것들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각색, 편집, 촬영 등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들을 계속 함께해 온 스태프들과 명배우들의 협업이 이것을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원작 대신 마치 란티모스의 오리지널 스토리인 것처럼 그 이야기와 스타일을 제대로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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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벨라를 고드윈은 집 안에만 두려고 하고, 자신의 조수로 고용한 맥스(라미 유세프)를 벨라와 혼인하도록 '계약'시키기도 한다. 여러 사건들로 벨라는 그러나 (어느 정도는 고드윈의 묵인 하에) 집 밖으로 '여행'을 떠난다. 런던의 '집'에서 출발한 이 서사는 각기 다른 의미로 벨라를 가두는 또 다른 공간들을 거친다. 리스본, 알렉산드리아, 파리 등을 지나는 동안 여러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수많은 정보(ex. 타르트 먹는 법, '상류사회' 예법에 맞게 말하는 법 등)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빨아들인다. 이것은 단지 성장담이 아닌, 타인과 사회와 역사에 의해 규정되어 온 관습을 깨는 벨라의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모험담이다. <가여운 것들>이 만들어진 영화 내외적인 형식과 작법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아름답지만 멍청한' 채로 시작했던 벨라라는 캐릭터가 전형적이지 않고 타인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은 채로 스스로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질서를 재편해 나가는 과정이 서사적으로 주는 여운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걸 경험해야 해. 좋은 경험 뿐만 아니라 치욕, 공포, 슬픔까지도.
그래야 세상을 파악할 수 있지."
불완전한 이들이 만들어 낸 세계의 총체인 '집 바깥'을, '벨라'는 어떤 편견도 없이 기이한 방식과 과정으로 모험한다. 여정의 끝에서 벨라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단지 위험하고 폭력적인 세상으로부터의 낙담과 좌절이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결합되는 동화가 안겨주는 기묘한 연대감이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얻어내는 나름의 질서와 존재에 대한 자각까지도 벨라를 그리고 관객들을 기다린다. 결국 특정한 누군가가 단순히 가엽거나 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시야와 렌즈에 따라 저마다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맥락 하에 말하고 행동한다. 거기에는 벨라를 내려다보는 시선도 벨라가 내려다보는 또 다른 시선도 공존하기 마련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끊임없이 무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광각, 어안 렌즈 등의 활용은 물론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 의도적으로 관객을 영화와 거리 두게 만들거나 예상을 깨게 만드는 유머와 풍자의 활용까지 <가여운 것들>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의 단연 돋보이는 화제작 중 하나로 손색없는 걸작이다.
3월 6일 국내 개봉, 141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가여운 것들> 국내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HGptTzZQE-w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리뷰:
https://brunch.co.kr/@cosmos-j/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