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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1. 2024

바람의 사생활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더 랍스터>(2015)를 통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이미 사랑을 다룬 적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기에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랑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또 불완전한지에 대해 ‘커플 메이킹 호텔’이라는 극단적인 설정과 화법으로 관찰했던 그의 시선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에 이르러 인물의 복잡한 내면으로 한층 깊이 파고든다. 곳곳에 무심히 배치한 유머는 여전하고, 전작들과 촬영감독이 바뀌었지만 그의 영화임을 잊지 않을 수 있게 배려라도 하듯 특유의 노골적인 고속 촬영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잦은 광각 렌즈 사용을 비롯한 현란한 카메라 워킹과 눈을 잠시도 뗄 수 없는 의상과 미술도 오직 ‘앤’(올리비아 콜먼)과 ‘애비게일’(엠마 스톤), ‘사라’(레이첼 바이스)의 세 캐릭터보다 먼저 말할 수 없다.


18세기 초의 영국. 각종 질병을 달고 살면서 잦은 유산과 이른 사별 등으로 여왕 ‘앤’은 삶에 지쳐 있는 듯 보이고 그 옆에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권력의 실세이면서 여왕과 은밀히 애정을 나누는 공작부인 ‘사라’가 있다. 쇠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애비게일’이 왕궁의 하녀로 새로 들어오고, ‘앤’과 ‘사라’의 관계에는 그 후 변화가 생긴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컷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이 단기간에 끝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 달리 적어도 자신의 사랑만은 영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불안한 미래를 지탱하게 해주는 건 서로가 계속해서 함께이고자 하는 마음일 테니까. 그러나 얄궂게도 대부분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앤’과 ‘사라’는 어릴 때부터 친분을 쌓아왔을 것으로 짐작되고, ‘앤’이 수많은 유산과 사산을 거치며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는 동안 ‘사라’는 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앤’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에 흔들림이 생기는 게 단지 ‘애비게일’의 등장 때문일까. 물론 여기에는 단지 사랑만 있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신분 상승의 욕구가,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재확인하려는 계산이 따른다. “호의(favor)는 바람처럼 쉽게 방향을 바꾼다.”라는 대사는 세 사람이 아닌 야당 당수 ‘할리’(니콜라스 홀트)의 말이지만,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 앞서 우리의 심장은 각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뛰고, 하나의 관계를 바라보는 둘의 시각은 같을 수 없다.


영화 속 세 사람은 저마다 상대의 질투를 알면서 일부러 이용하고, 서슴없이 거짓말을 반복하고, 조바심 나게 만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절박해지고. 그렇게 팽팽해 보이던 삼각형은 깨어지더니 새로운 도형으로 재정립되어간다. 토끼나 오리를 비롯한 영화의 여러 동물들 중 ‘랍스터’가 등장하는 걸 보며 어쩔 수 없이 <더 랍스터>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는데, <더 랍스터>의 호텔은 함께 있어야 살 수 있는 곳이고 숲은 혼자 있어야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권력과 사랑이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보면서 ‘앤’을 대하는 ‘사라’와 ‘애비게일’의 방식이 사뭇 다르다는 건 마치 관계에 있어 거짓과 진실 중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고 느꼈다. 여왕을 두고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사랑이니까!”라고 외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관계의 시작에서부터 이미 ‘진실하지 않음’을 마치 가면처럼 무기로서 지니고 있다. ‘앤’ 역시 무능하거나 나태한 군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허나 어쩌면 ‘앤’은 미처 다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은 상처를 안은 인물이기 때문에 무엇에든, 누구에게든 의지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컷


"너희는 아는가, 이별하는 자가 아니라,

영영 이별하는 상태에 사로잡힌 삶 위에 덧입는

휘황찬란한 의복에 대해"

-김상혁, ‘여왕님의 애인은 누구인가’ 부분,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2016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보고 나서 시집을 집어 든 것은, 영화의 마무리에 대해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긴 글을 끼적이고 싶은 생각들이 한가득 자리했고, 게다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씁쓸함 같은 것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단 한 번만 겪고 마는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여러 번의 사랑을 겪고 관계에 실패하며 상처의 금을 간신히 메워나가면서도, 사람은 끊임없이, 바람처럼 어제와 다른 쪽으로 마음을 먹으며 자신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어 할까. 엔딩 크레딧에 이르면 엘튼 존의 1969년 발표곡인 ‘Skyline Pigeon'이 시치미 떼듯 흘러나온다. 400여 년은 지난 이야기가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진 건 그래서일까. (2019.03.13.)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국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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