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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11. 2024

다음 문장을 읽고 따라 하시오 (1)

#1.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단편 소설집을 펼친 J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이게 뭐야!" 하며 책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한쪽 눈도 그 문장을 읽는 동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소설집은 문장이 지시하는 바를 읽는 사람이 체험 혹은 경험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이끌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쓰면 그 문장을 읽는 사람도 한쪽 눈이 얼마 동안 안 보였고 "고구마무스케이크를 먹었다"라고 쓰면 그 맛이 느껴졌다. 조금 뒤 다시 양쪽 눈 모두 보이게 된 J는 "이거 무슨 옛날 4D 영화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책 표지 뒷면에 쓰인 '작가의 말'을 읽었다.


'한 권의 책이 읽는 이를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햅틱 바이저를 얼굴과 양손에 착용하고 보이는 화면을 응시한 채 손을 몇 번 휘적거려 마켓에 출시된 경험을 다운로드하면 앉은자리에서 암벽 등반도 할 수 있었고 중세 유럽의 성주가 되어 영지를 침략한 적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다. 혹은 우주인이 되거나 바리스타가 되기도 했다. VR과 공간 컴퓨팅이 꽤 발전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무겁고 두꺼운 종이책을 굳이 사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소수의 유명 작가와 인플루언서의 책이라면 예외였다.


'작가의 말'에는 소설집을 읽는 법에 대해 안내되어 있었다. 요컨대 소설의 문장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되었다.


'1) 감각지시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사람의 몸으로 느끼는 감각들에 관한 서술이다. 상상될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소설에서 지시하는 그대로 독자에게 옮겨진다.
2) 감정표현문: 짜증, 기쁨, 슬픔, 화남, 따분 등 정서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에 관한 서술이다. 소설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독자에게 옮겨질 수 있다. 다만 독자가 이해한 바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맥락으로 풀이될 여지는 있다.
3) 행동서술문: 책을 펼치거나 무거운 것을 들거나 자리에 눕는 등과 같이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이다. 단, 독자가 물리적으로 실제 행할 수 있는 행동만 독자에게 경험된다. 예를 들어 열대지방에 사는 독자가 스키 점프를 할 수는 없고 침대에 누운 독자가 강물에 빠질 수는 없다.'


햅틱 바이저를 착용해 경험하는 가상현실은 거의 모든 걸 실제처럼 느낄 수 있지만 이 소설은 꼭 그렇지는 않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셈이었다. 반쪽짜리 가상현실 베타 버전이라 해도 좋고 2D 영화가 4D 영화로 발전된 정도의 느낌을 제공해 주는 시도라 해도 좋았지만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원하는 경험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가상현실과 달리 소설의 저자가 의도한 대로 독자는 수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점이다.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2.


한쪽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꿈에서 깬 J는 너무 오래 옆으로 누운 채 잔 탓에 한쪽 팔이 거의 마비된 것처럼 저렸다. J는 반대쪽 손으로 저린 팔을 주무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책이 어디 있어." 전날 포장해 온 요즘 인기 있다는 고구마무스 조각케이크와 아이스팩을 냉장고에서 꺼낸 뒤, 에스프레소 머신에 캡슐을 올렸다. 랩탑을 열어 라이브 뉴스 채널에 접속했다. 아침 뉴스 진행의 고단함을 미처 다 이기지 못한 듯 건조한 앵커의 목소리는 최근 뚜렷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현상'이 각지에서 보고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현상'이라 함은, 멀쩡하게 인도를 걷던 행인이 가로수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병원에 실려 왔다든지, 찾는 소비자가 없어 단종 직전이었던 병음료가 소셜미디어 언급량 증가 등 특별한 징후 없이 갑자기 편의점 매대에서 싹 팔려 나갔다든지 하는 크고 작은 뉴스들이었다.


그 '현상'에 '연루'(우선 이렇게 표현하기로 한다)된 사람들은 수술을 해야 할 만큼 크게 다치는 것에서부터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 말다툼을 벌이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현상'으로부터의) 반응을 나타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가로수에 박치기를 했다는 그 행인은 스마트폰에 열중하느라 가로수를 못 본 것도 아니었고 자기가 왜 머리를 박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친구와 민사 소송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다퉜다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다투게 되었는지는 잊은 채 일단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다툼에 집중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금세 뉴스는 생활 물가 이야기나 다음 달 출시될 차세대 햅틱 바이저 이야기 등으로 넘어갔다.


"6월 초부터 사람들이 더위를 먹었나." 6월 말은 되어야 길가에 만발한 것이 보이던 능소화가 6월 초부터 이미 진한 주황빛을 띠고 있었고 예년의 한여름이 아니어도 극심한 더위는 반쯤 일상이었다. 케이크를 한 숟가락 더 퍼 먹으며 J는 마지막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게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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