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을 그렇게까지 또렷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은 내게도 분명 지나간 시절 내내 지금의 나를 형성한 어떤 잔영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을 처음 만나거나 재회할 날이 올까. 계속해서 반복되는 꿈처럼 그중 특정한 순간이 새겨진다면 바로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2022)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OTT에서 '찜'해두고 있던, 재개봉인 줄도 모르고 우연히 극장 상영시간이 맞아 이때다 싶어 관람한 금요일 저녁의 이 영화에도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아련하고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영화 ‘애프터썬’ 스틸컷
기를 쓰고 떠올려내고자 애썼을 나날들. '그땐 왜 몰랐을까' 애달프기도 했을 순간들. 그럼에도 순간을 재구성하고 남아 있는 조각을 어떻게든 되살려내고자 했을 마음들이 <애프터썬>의 연출과 각본을 고스란히 이룬다. 주변인보다는 자신에게 안팎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소화하느라 열한 살 '소피'는 분주했고 그동안 아빠의 내면에 서서히 몰아닥친 격랑을 헤아릴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뒷모습에 드리운 그늘을 읽어내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걸 <애프터썬>의 중후반은 잘 보여준다. 의도적으로 영화가 생략하거나 설명하지 않은 것들은 고스란히 관객 각자에게 여운처럼 다가와 짙게 남는다. 캠코더에 담긴 '인터뷰'는 영화 속 현재의 소피가 진정 아빠에게 묻고 싶었을 질문처럼 다가온다. "11살의 아빠는 지금 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이러한 언어가 다가와 감정적인 여운을 남기는 건 지금 그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인데, 마치 이 '어찌할 수 없었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연출 하에도 지나온 시절을 향한 연출자이자 작가의 감정은 고스란히 담긴다. 그 순간을 마치 현재인 것처럼 눈앞에 되살려내려는 안간힘과 기억의 오류 내지 한계를 인정하는 무의식 중의 깨달음이 모여 끝나지 않고 계속될 이야기를 빚어낸다.
'소피'가 거의 20년이 지나고서야 문득 떠올리게 된 혹은 재구성한 유년의 튀르키예 여행 기록은 짧게 녹화된 홈비디오 영상을 기반으로 그 자체로 스토리텔러의 어떤 시도 혹은 의지가 집약된다. 그때 '나'(소피)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때 왜 아빠 '캘럼'의 변화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까. <애프터썬>의 이야기가 지나간 뒤 어쩌면 우리는 여운 속에서 그렇게 매듭짓지 못한 이야기, 오래도록 미련과 회한처럼 떠오른 이야기들이 남아 서사의 형태로 재구성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이 소설이 된다고 한 김연수의 문장도, "소리는 엄마가 떠난 뒤에도 엄마 얼굴을 자주 그렸다. 엄마의 눈동자에 고인 빛을 표현할 땐 더 공을 들였고, 어깨선을 다듬을 땐 실제로 엄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했다. 그렇게 한때 엄마였거나 여전히 엄마인 선들을 좇으며 손끝으로 엄마를 만졌다. 그런 식으로 엄마를 한번 더 가졌다."(**)라는 김애란의 문장도 겹쳐서 떠올렸다. (2024.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