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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자리에 아직 남아 있는 안부

우리는 언제든 회사를 떠날 수 있다

by 김동진

공덕 어느 족발집에서 보쌈 한 점에 막걸리 한 잔을 원샷 한 뒤의 첫마디가 "혹시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해볼 생각 있어요?"였나. 팀장님*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O 모 회사에서 퇴사할 무렵이었다. 팀장님은 O에서 이미 몇 달 전 퇴사했고 나는 아직 다니고 있었을 때. PR과 마케팅 업무만 경험해 본 데다 제약·바이오 업종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팀장님은 "동진, 업무 할 때 감정 기복 없는 편이고 글 잘 쓰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라며 IR에도 잘 어울릴 것이라고 입사를 부추겼다. 팀장님의 적극적인 추천 덕분이었을까.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민감했을, IR 경력직이 아닌 점과 동종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소득활동을 하고 있는 점은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신입으로 들어갔지만, 아무리 회사 규모가 다르다 해도 연봉을 직전 회사 대비 사분의 일이나 올리고 들어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이직은 정말 잘한 것이었다. 그렇게 입사한 이곳(H)에 재직한 지 벌써 5년이 되어가고 있다.

일 년 반 가량 커리어 공백기를 지나 일거리를 찾아 입사하게 되었던 O는 IMC(PR과 마케팅 등을 통합적으로 이르는 말) 분야에서 식음료, 제약 등의 고객사를 둔 대행사였다. 거기서 연을 맺은 팀장님은 H에서도 연이어 내 사수이자 직속 상사였다. 홍보팀으로 입사해 2년 가까이 팀장님과 다른 팀원 한 명과 한 팀으로 일했다. 회사가 소액주주들과 경영권 분쟁으로 풍파를 겪는 중에도 내게는 거의 팀장님의 존재가 이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 같은 것이었다. 그런 팀장님이 별안간 회사를 떠나게 됐을 때 많이 섭섭하고도 아쉬웠다. 여러 사정들이 있었지만 내게는 이제 회사에 기댈 동료가 사라진 느낌이었으니까.


그로부터 얼마 뒤 점심을 같이 한 증권업계 기자는 갈비를 뜯으며 "모르는 사이에 0 팀장님 결혼하셨더라고요?"라고 서운한 티를 냈다. "이런 거 보통 손절이라던데..." 하면서. '손해' 본 것까지는 내게 없어서 손(損)보다는 절(切)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상대에게 나는 경사를 굳이 알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혹은 아닌 것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그렇게 우연히 깨닫게 되는 일은 꽤 어리둥절한 섭섭함을 동반한다. 지금은 누구와도 언제든, 단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멀어질 수 있으니 초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내게도 당시는 어떤 맥락으로든 서운함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결혼식에 누구를 어디까지 초대할 것인가 하는 일도 꽤 쉽지 않은 고민거리라는 것도 짐작은 되지만 두 회사에 걸친 3년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닌데.


이후 팀장님의 임신과 출산도 카카오톡 실행 시 상단에 표시되는 프로필 업데이트를 통해 알았다.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자평하자면 ERP 메신저에 여전히 남아 있는 채팅 기록을 미루어 나는 꽤 사무적이다. 그럼에도 팀장님은 소속과 환경이 바뀌더라도 제법 오래 안부를 주고받을 사람인 것처럼 막연히 여겼던 것 같다. 한 회사에 2년 이상 다닌 것도 지금이 처음이라서 더 그렇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업무에 있어서 특별히 의견을 구하거나 조언을 구할 만한 것이 없기도 한데 건수를 만들어 내가 굳이 먼저 안부 연락을 하는 건 팀장님의 선을 넘는 일일까도 생각한다. 아마도 실제로 연락할 계기는 지금의 직장을 퇴사하고 이직할 무렵에나 찾아올 것 같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몇 마디를 미리 궁리해 본다. "팀장님, 저 00000 퇴사했어요" 대뜸 이런 식으로.


팀장님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내 소속 조직명과 상사는 여러 번 바뀌었다. 하는 일은 거의 같았지만 (위의 팀장님과 함께한) 홍보팀이었다가 이후 대외소통팀이, 경영기획팀, 전략기획실, 대외협력실이 되었고, 그간 경영기획팀장님 또는 사장님(COO)이 조직도 상 내 직속 상사였다. 팀도 대표이사 직속이었다가 재무경영본부 소속과 전략기획본부 소속을 거치는가 하면... (아무래도 개편을 위한 개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대외협력실장(상무)님을 모시고 있다. 회사의 최대주주도 몇 차례 바뀌다 보니 조직이 바뀌거나 상사가 바뀌는 일은 꽤 여러 번 겪어본 일이 되었다. 격랑 가득한 회사에 5년 가까이 있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 같기도 한데, 업무로 연을 맺은 모든 이들과 친밀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앞으로도 계속 함께일 것이란 보장도 없으니 요즘은 어디로부터든 누구로부터든 떠나가거나 떠나올 수 있음을 염두한다.


최대주주가 바뀌는 과정에서 구조조정도 두 번 있었다. 처음에는 경영위기가 명분이었다. "(...) 이에 회사의 한정된 자산의 효율적인 집행 및 비상 경영 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긴박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형식상 희망퇴직을 먼저 받은 뒤 경영진 판단에 따라 특정 조직을 없애거나 인원을 감축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살아남은 건 그 최대주주를 맞이하면서 기획/IR/공시 측면에서 업무 기여도 및 중요도를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이후 최대주주가 또 바뀌고 나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됐다. 이번에는 특정 조직에만 집중됐다. 신약 R&D가 중심이자 시장 가치의 핵심 요소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진도가 앞서 있던 프로젝트에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얻게 되자, 한동안 이런저런 새 사업 분야 진출을 타진했음에도 그게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과거 구조조정 대상자였으나 재입사 한 뒤 또다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부서도 있었다.


지금의 회사에 있으면서 여러 이유로 회사를 떠나는 이들을 자주 접해왔다. 인사팀 자리가 근처여서 왔다 갔다 하는 얼굴들을 보게 된 덕분이기도 한데, 그냥 '가시는 구나' 하고 시큰둥하게 넘기는 경우도 있고 퇴사를 실감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조직과 자리 배치가 바뀌면서 가까운 자리에서 협업하게 됐으나 상기의 사정으로 몇 달 만에 조직이 없어져 퇴사하게 된 사원은 사무실 메이트로 함께할 수 있던 덕분에 즐거웠다며 쪽지와 쿠키세트를 주고 갔다. 그 사원과 같은 팀이었던 나와 동갑인 과장과는 우연히 책과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어 지금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는다. 배웅한 분들 중에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서로 팔로우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상당수는 자연스럽게 연락할 일이 없게 된다. 대체로 떠난 줄 모른 채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한다. 그들의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한 채 정기공시의 '임원 및 직원 등의 현황' 챕터에 직원 수와 관련한 항목을 기재하는 건 가끔 좀 모순적인 일 같기도 하고. 그 숫자가 전 분기 대비 늘어 있거나 줄어 있음을 볼 때마다, 떠나온 얼굴들과 지나간 사람들을 헤아려보게 된다.


한 사람이 퇴사를 하면 그 사람만 회사를 떠나는 게 아니라 관계의 양상도 바뀌고 시간도 다르게 흐른다. 빈자리는 곧 누군가 대신하겠지만, 그곳이 누군가 머물렀던 곳임을 잊어버릴 수 없다. 나 또한 이곳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떠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언제든 짐을 싸야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얼마간 갖고 작별의 단어들을 골라 두어야 할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언젠가는 찾아오게 될 이사의 순간을 예비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무슨 조화인지 최근에는 회사 사옥과 토지도 자산 유동화를 위해 매물로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꼭 퇴사가 아니더라도 사무실이란 공간을 떠나보내는 순간이 올 수 있겠다는 점이 공교롭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몰래 이 글을 끼적거리는 공간과도 헤어져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것들 중 어떤 것들은 매 순간 현재의 자리에서 추억의 자리로 옮겨가는 중이다.



*일종의 고유명사적인 의미로 본문에서 '팀장님'이라 계속 표기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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