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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생기는 기분

고마웠던 부산국제영화제의 동료들

by 김동진

얼핏 잘 지켜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일상에 삐걱거리는 것들은 있었습니다. 한 번도 떨어뜨린 적 없는 (비싼) 휴대전화를 떨어뜨리는 일이나 그렇게 피곤하지도 않은 아침에 1시간 넘게 늦잠을 자서 반반차를 쓰는 일,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서 미용실 예약에 늦는 일이라든지. 며칠 전에도 퇴근 후 좋아하는 기자의 신작 산문 북토크에 가는 길에 영등포구청역에서 합정 방향으로 환승해야 할 것을 문래 방향으로 환승해 타기도 했습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부산을 다녀오게 된 건 단지 상영하는 영화의 면면이 풍성하게 이목을 끌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어느 날 우연히 상영작 발표 소식을 보면서 절로 감탄사가 나오기는 했지만요. 영화제에 간다는 건 이름 그대로 축제에 간다는 뜻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축제는 일상을 벗어나는 비일상의 행위입니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그러하듯이 말이죠. 몇 주 전에 안동에도 다녀왔으니 저는 아마도 산재한 고민들에 대한 생각을 적당히 유보하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일생에서 그런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화두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이 정도 일탈은 괜찮다고 해주시겠죠? 잠시라도 머리를 비우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특별히 동행을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축제가 열리는 곳이니까, 혼자 가도, 심지어 아무런 영화를 예매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매는 특별상영과 일반상영으로 나뉘어 두 날에 걸쳐서 진행됐습니다. 일전에 이 글의 수신인 중 한 명이 영화제에 자주 다녀왔다고 한 게 생각 나 제가 가볍게 "혹시 부산국제영화제 가시나요?"라고 물어본 게 아마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같이 있는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을 경유하여 다시 저에게 또 다른 이가 "혹시 부국제 피켓팅은 어떻게 성공하시나요···?"라고 물어 오는 일로 되돌아오는 것이죠. 저 또한 이번에 처음 예매에 도전하는 것이었지만 뭐라도 더 아는 것처럼 팁을 늘어놓으며 용병을 자처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어요. 나 부산에서 이 친구(들), 마음을 기꺼이 터놓을 수 있는 동지를 같이 영화제를 즐길 동반인 삼으면 너무 반갑고 좋을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이런 친구들이 필요해. 여기서 말하는 필요는 어떤 욕구나 결여를 충족시키는 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시절의 추억을 만드는 일을 뜻했습니다.



이런 친구들. 저는 정말 깊은 고민을 나누지 않는 편이었구나 하는 것을 근래에 깨달았답니다. 지난달의 글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언제든 대뜸 불러낼 수 있을 만큼 편한 친구라 할 만한 얼굴들은 거의 없었던 것 같거든요. 왜 없었을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흉금을 터놓고 속내를 깊게 털어놓는 일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감추고 숨기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화두가 나오지 않으면 먼저 나서 이야기를 꺼내는 편은 아니었다고 할까. 타인의 고민 이야기는 잘 들어주려 노력했지만 제 고민은 어느 정도 속이 정리되고 깃이 세워지기 전에는 주변에 잘 공유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름의 변명이라면 어딘지 내 무거운 감정을 누군가에게 전염시키거나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저 살아가는 관심사와 취향, 가치관을 진솔한 방식으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나누는 일이 친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믿어 왔지만 정말 진정한 친구에 이르는 통로는 나를 무방비로 내보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열리게 되나 봅니다. 그때 그 글을 쓴 덕분에 '제 이야기'를 많이 끄집어낼 수 있었어요. 물론 있는 그대로 헤아려주고 진심 어린 조언과 응원 내지 위로, 끄덕임을 보태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죠. 그래서 더 든든하고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글 바깥에서도 기꺼이 늘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는 좀 나약해도 괜찮을 것 같아, 하고 믿게 되는 이들이 있어서요.



'泣き虫でもいいかな(울보여도 괜찮을까)

強がらないでいいよ(강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아)'

-Mrs. GREEN APPLE, 「点描の唄」(점묘의 노래)에서



여러 친구들. 어떤 친구는 거의 글이 올라오자마자 읽고는 금주 중인데 술이 당긴다며 자기 경험에서 비롯한 생각과 조언을 들려주었습니다.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추천해 주는 일이나 염려를 동반한 안부를 나누어주는 일 같은 것들로 그들 덕분에 지나 보냈다고 능히 말할 시간들이었죠. 특히 한 친구와는 대뜸 오늘 저녁에 뭐 하시냐고 물어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는데 밤늦은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이야길 나누다 보니 마치 오래된 친구가 생기는 기분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정말로) 글을 읽는 일은 단순히 활자에 찍힌 글씨를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쓴 이의 뒷모습을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니까, 서로 결이 맞아 그리할 수만 있다면 넓은 의미로 우리는 이미 모두 친구이지만 조금 더 그 이상인, 친구 말이죠. 마치 원래 친구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여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읽힐지 모르겠습니다만. 속에서 미처 다 정리는 되지 않았던 것도 일단 꺼내 놓으니 조각이 마저 끼워지는 일. 이해받는다고 느끼는 일. 맥락이 조금 덜 채워진 생각을 거칠게 내어 놓아도 충분한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너무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경험해 보면서 저는 이러한 다정함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했습니다. 적당히 함구해도 충분히 채워 간파해 주는 그런 다정. 어느 출근길이든 퇴근길이든 대부분 잠들었을 새벽녘이든 다정을 만나거나 그것의 온기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습니다. 추천해 준 노래를 반복 재생하면서도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어요.


직항 14시간 비행을 앞두고도 이렇게까지 염두를 해본 적이 없거늘, 예매한 영화들에 더해서 나누어 줄 요량으로 취소표도 몇 장 더 건지고 그걸 건더기 삼아 속에다 뜨거운 김칫국을 열심히 데우며 밤바다를 함께 볼 궁리를 했습니다. 영화제에 갔다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영화만 볼 순 없으니까요. 포차, 바, 식당 같은 장소들을 뒤적이는 시간들을 지나니 어느덧 토요일 오후가 되어 부산에 당도했습니다.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영화제 예매 작품 시간표도 공유용으로 만들었고 다 가지도 못할 맛집 리스트도 네이버 지도에서 공유용으로 만들었지요.


우리는 따로 또 함께였습니다. 도착한 시간도 숙소 위치도 제각각이었고 저녁 늦게 만날 장소도 당일 저녁이 되어서야 전화로 예약했습니다. 다들 영화 한두 편 정도를 하루동안 보고 난 뒤 광안리 해변, 광안대교가 내려다 보이는 이자카야에서 술잔과 안주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정된 시간, 대부분 하루의 숙박이 가능했을 정도의 여유로 그러나 새벽부터 움직인 채로 만나 제법 여행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거기엔 바다 내음을 흠씬 맡아두는 낭만과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을 너그러움 같은 게 생깁니다. 4천 석 정도의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만난, 부산을 배경으로 한 그 영화가 아주 빼어난 작품은 아니었지만 영화가 투박할지라도 넉넉히 영화의 일부인 듯 분위기를 채워주는 극장 주변 차량 소음과 관객들의 어수선한 잡담 같은 것처럼요. 저는 취기가 더 무르익기 전 준비해 온 엽서와 현장 굿즈숍에서 집어 든 영화제 굿즈를 하나씩 친구들에게 내밀었습니다. 영화는 물론 각자의 글쓰기 이야기며 몇 달 치의 근황이며 보따리를 몇 개 꺼내는 동안 대화는 자리를 옮겨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모래사장이든 데크든 해변 어딘가에 함께 쪼그려 앉아 소주든 맥주든 각일병을 추가로 기울이려던 2차 계획은 근처 넓은 숙소를 잡은 친구들의 식탁으로 옮겨와 편의점에서 산 술과 과자와 횟집에서 갓 사온 회,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채워졌지요.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은 정말이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영화 관람 일정이 있었지만 우리가 헤어진 시간은 오전 4시 40분경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누군가는 옆에서 짠 해주지 않아도 가만히 소주잔을 홀짝거리며 또 누군가는 같이 들을 곡목을 만지작거리며 새벽은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각자의 인생 영화도 꺼내고 어떤 이의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나 업무 스트레스도 풀어놓고 있으니 부산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들뜨고 시간이 느리게 가도록 알맞은 취기가 계속되도록 해주었던 때가 지금껏 있었나 싶었습니다. "그때 이곳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게 아니라 정확히 바로 지금 이 장면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 나는 지금 이 순간의 한복판에 서서 이 순간을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내향성의 정도는 다르겠습니다만, 혼자서 고요한 나들이와 사색의 시간으로 채울 수도 있었을 영화제의 주말의 특정 시간을 이렇게 함께인 채 보내는 일은 제법 결심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슷한 일정으로 부산에 왔더라도 영화의전당을 오며 가며 잠깐 인사 나누는 일로 족했을 수도 있지요. 이 부산의 밤은 조금씩의 각자의 마음들이 모여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개인톡으로 영화제를 중얼거렸고 누가 누가 온다는 정보를 들었고 그 누구 중 누군가는 부산에 오는 인원을 모아 카톡방을 만들었어요. 또 누군가는 단체 카톡방을 선호하지 않지만 부산에 온다는 누군가에게 따로 합석 여부를 물어주기도 하였고요. 졸음을 감수하면서도 저와 함께 아침 영화를 관람해 주고 좋은 카페도 소개해 준 친구,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를 보며 그 친구가 몇 번 꾸벅꾸벅 하는 동안 저는 깨울까 망설이다 깨우지 않았습니다. 졸음을 쫓으려 애썼을 당신께 미안하고 고마워서요) 이자카야를 전화로 예약해 준 친구, 초상권에 민감하다고 했지만 제 미러리스 카메라의 프레임 안을 허락(?)해 준 친구, 당일 참석 여부를 미처 확인하지 못해 엽서와 굿즈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히려 굿즈를 안 좋아한다며 저를 안심시켜 준 친구, 제가 청한 영화제 데일리(영화제 기간 중 곳곳에 매일 비치되는 일간지)를 구했다며 잊지 않고 메시지 준 친구, 그리고 에어비앤비 숙소를 번개 2차의 장소로 넉넉히 허락해 준 친구(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상영작을 예매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비슷한 마음들이 모인 건 아니었을는지요.


책이나 영화 등을 매개로 하는 모임을 제법 오랫동안 경험했지만 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히려 서로 오래 알아오고 친한 사이, 예를 들면 학교나 동네, 회사 등의 경로로 출발한 익숙한 관계에서는 의외로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죠. 사적인 영역을 적당히 모르고 사교적 자리에서 적당히 아는 사이에서 어디 털어놓기 어려운 속 깊은 고민을 더 잘 털어놓게 되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더 열심히 꺼내 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라는 <비포 선라이즈>(1995) 속 대화를 인용해서 말한 적이 있었죠. "여기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라고 살짝 변용하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우리는 그러니까 제시와 셀린처럼 서로에 대해 잘 모른 채로 출발해 경유하는 여정 속에서 만나 가볍게 지적인 대화를 진심을 담아 이어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어딘가에서 지금도 펼쳐지고 있을 수많은 커뮤니티와 바로 '우리'를 비교한다면, 우리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타인의 글을 열심히 읽고 헤아릴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으리라는 것이겠지요. 약속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모임이나 사교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자는 모두 짧은 시간이나마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자나 마찬가지인 것이겠고, 그 여행지에서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선입견이나 상대에 대한 예판을 잠시 제쳐놓고 오직 대화의 내용과 말들이 오가는 사이들에 집중합니다. 그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과도 얼핏 닮아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말했듯 크고 어두운 상영관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영화가 주는 경험이 당신을 씻어 내리도록 허락하는 일. 이미 잘 표현된 진심을 헤아려 거기 담긴 마음을 글썽거리며 읽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각자의 영화를 보고 따로 또 같이 하나의 이야기를 기울여 보는 일. 이것보다 더 '영화적'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요? 앞에서 오래된 친구가 생기는 기분이었다고 적었죠, 독서모임 번개가 아니라 오래된 친구들의 여행인 것처럼 혼자서 생각하며 가만히 소주를 물처럼 들이켰습니다.



새벽까지 긴 하루를 보낸 뒤 그다음 날도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영구가 기획한 '광안리 해변 도서전'에 간 친구들과, 그리고 아침 상영 영화를 관람한 뒤 수영역 근처의 카페로 이동한 한 친구와 저로 크게 나뉘겠군요. 카페 2층에는 마침 영화를 주제로 한 작은 전시와 소품숍이 열려 있었습니다. 계단 차임판에는 좋아하는 <헤어질 결심>(2022)의 대사가 적혀 있었고 우리는 그걸 쪼그리고 앉아서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영화 대사를 눈에 담는 모습이 어쩐지 저와 닮아 있어 저는 그 친구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주었군요. 이 친구들과 헤어지는 순간이 사실 너무 아쉬웠습니다. 이 친구들이 있어 좋은 순간이 더 특별해졌는데, 한 명 한 명에게 고마움을 제대로 표하기도 전에 우리는 곧 다시 서울로,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했으니까요. 여러분은 혹시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기분을 아실까요? 이 순간 가지 마... 다시 토요일 저녁으로 돌아와 줘... 하면서 말이에요. 하룻밤의 여운이 제법 남았습니다. 당신, 당신들과 더 오래 친구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이 글은 부산 여정을 함께해 준 친구들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썼습니다. 친구들인데 왜 존대를 했는가 싶으시겠지요,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분명 이 글을 읽을 그 친구들, 바로 여기 당신들이 있어 지금 이 시절을 잘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언젠가는 희미해지고 시절에는 먼지가 내려앉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트레바리도 평생 동안 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요. 사랑이 이사를 떠날 수 있듯 우정도 그러하고 이런 날들도 언젠가 생의 팍팍한 계산과 한계에 부딪혀 다른 기억들에 자리를 내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나직이 당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입으로 불러 봅니다. 부산에서 당신들과 함께였던 이 나날을 제법 긴 시간 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편애하는 친구들. 당신들에게도 이 시간이 소중한 나날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서울에서 곧 뵙겠습니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마음의숲, 2012, 160쪽

**장류진, 『달까지 가자』, 창비, 2021, 156쪽


영화 '허락되지 않은'의 무대인사와 GV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타기 전 부산역에서, 그리고 티켓들
영화제 굿즈숍에서
숙소 체크인 후 해운대 해변에서
열심히 찍는 나를 찍어주겠다며 한 친구가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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