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2025) 리뷰
좋은 영화는 관객이 살아본 적 없고 살아갈 일도 없을 어떤 생을 (그리고 세계를) 스크린에 구현한다는 말을 최근에 들은 적이 있다. 관객이 살아주었으면 하는 삶을 영화로 보여주는 일, 나아가 감독 자신이 믿고 실재하기를 바라는 삶을 영화의 언어로 발화하는 일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불과 며칠 만에 정확히 바로 그러한 영화를 만나는 기분은 꽤 벅차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그 영화 속 어떤 장면도 간과하지 않고 생생하게 모든 의미를 다 헤아리고 싶게 만들어 버리는 작품.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2025)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아마도 올해 맨 앞에 두고 싶은 한국영화를 거론할 때 절대로 빠뜨릴 수 없으리라고 감히 믿게 되는.
여느 영화들이 그렇겠지만, <세계의 주인>에 있어서 내게 '살아본 적 없고 살아갈 일도 없을' 생이라는 건 엄격한 사실의 영역이다. 나는 그저 관객이기만 한 게 아니라 '남성 관객'이니까. 주인(서수빈)에게도 미도(고민시)에게도 일어났던 일을 나는 겪지 않았고 겪지 않을 테니까. 세상에는 겪지 않은 일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세계의 주인>을 관람하는 동안 나는 그래서 영화 속 인물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기를 멈춘다. <세계의 주인>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주연이 아니어도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삶에서 애쓰고 있고 영화가 그걸 다 발화하지 않지만 위악을 부려 괜찮다고 말하는 이의 뒷모습도 미처 말하지 못한 흉터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헤아릴 줄 알거나 혹은 가만히 침묵해야 할 것이라고 영화는 매 프레임 보여준다.
글을 쓰는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련의 장면은 주인과 수호(김정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견해 차이와 갈등이다. 과연 일상에 틈입한, 경우에 따라서 끔찍하기까지 한 그 상처는 앞으로 살아갈 생 전체를 잠식하고 영영 씻을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기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일생의 주인이기를 멈추고 포기하지 않은 채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세계의 주인>은 여러 촘촘한 장치로 그것을 은유하거나 질문한다. 예를 들어 주인이 정기적으로 가는 태권도장. 관장(이대연)은 아이들을 지켜보지만 태권도 외적인 것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도장에서 몰래 간식을 먹다 걸려도, 열쇠가 있다고 몰래 연습하러 오더라도, 관장은 이온 음료나 간식 따위를 비닐봉지에 담아 가만히 가져다줄 뿐 묻지 않고 타박하지 않고 다만 아이들이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과 육체를 컨트롤할 수 있기를 응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주인에게도 언성이 높아지는 이유가 있고 그건 수호 역시 마찬가지며 주인이 봉사활동을 하는 곳에서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비교될 수는 없지만 각자 가지고 있는 상처와 이유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연대와 사랑을 끝내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어른이라고 해서 상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인의 엄마 태선(장혜진)은 아픈 배를 감싸 쥔 채 술과 약에 의존한다. 성인이 된 미도는 물론 주인과 봉사 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 저마다 가지고 있거나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체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안전감을 주는 공동체가 있고 연대할 수 있는 마음의 언덕이 있으며 낯선 이가 틈입했을 때 단호하게 물러서기를 요구하는 결기가 있다. 동생이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하는 편지 속에는 누나를 생각하는 마술적인 마음이 있고 주인의 친구들은 때때로 주인에 대해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어찌할 바 모를 거리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끝내 친구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어른이 될까.
나조차도 나를 돌봐주기는커녕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한 시절에 영화가 가만히 내려와 어떤 판단도 대신하려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기'만을 택한다. 꼬집으면 아픈 게 사람 마음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게 인생인데 <세계의 주인>은 섣부른 위로도 조언도 아낀 채 그저 스스로도 잊고 있었을 동안에도 주인이었을 '당신'을 응시한다. 엇나가는 감정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속내도 말할 수조차 없을 오랜 상처도 봉합하거나 해결하려 들지 않을 때, 그렇다고 애써 괜찮다고 하지도 않을 때, 각본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마치 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생생한 일상처럼 느껴질 때, 그 영화는 넓고 다정한 품으로 사람의 자리에서 공존한다. 고통과 상처를 덮어놓아야만 삶이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믿어주고, 어떤 건 마술로도 사라지게 할 수 없으니 그저 그 자리에 두고 나는 당신과 가까스로 '우리'가 되어 세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함구해도 자연히 알게 되는 마음이 있고 눈빛만으로 문득 교감하는 진실이 있고 그게 인간의 일이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어제보다 오늘의 내 세계가 조금 더 다정한 이해와 사랑에 가까운 쪽에 놓여 있기를 간절히 다짐하게 된다. 누군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고 내게 물으면 바로 이 영화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기꺼이 말할 것 같다. 단 한 프레임도 놓치지 않고 삶에 새겨두고 기억하려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함께하고 싶다. (2025.11.02.)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2025)
10월 22일 개봉, 119분, 12세 이상 관람가.
각본/감독: 윤가은
제작: (주)세모시, 볼미디어(주)
배급: (주)바른손이앤에이
출연: 서수빈, 장혜진, 이재희, 이상희, 김정식, 강채윤, 김예찬, 고민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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