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르윈'(2013)과 11월
영화의 첫 장면이 사실 마지막 장면의 일부이기도 했다는 작은 조각으로 <인사이드 르윈>(2013) 이야길 꺼낼 수 있다. 잘려 나간 시간과 남겨진 표정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를 따라가면 이 영화의 정조가 서서히 드러난다. 공연을 끝낸 주인공 르윈은 정장을 입은 낯선 남자에게 이유도 모른 채 맞고, 다음날처럼 보이는 아침에 신세를 진 교수의 집에서 고양이를 실수로 놓친 채 문밖을 나서는 장면이 이어진다. 코트 살 돈이 없어 가벼운 외투 깃을 세운 채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그의 계절은, 작은 불운들이 포개져 체온을 빼앗아 가는 긴 하루들의 연쇄처럼 이어진다.
1961년의 어느 쌀쌀한 밤 가스라이트 카페의 조명은 난로처럼 그를 잠시 비추지만 공연은 그의 생계가 되지 못한다. 여러 친구 집 소파를 전전하는 신세에도 그는 기타를 목숨처럼 가지고 다니며 숨을 겨우 내쉰다. 상흔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르윈은 누군가와 함께했던 앨범을 만지작거리지만 듀엣 파트를 누가 대신 불러주는 일은 질색하고 가장 돈이 궁한 상태임에도 음악이 돈벌이로 취급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르윈에게는 돈 필요한 일들만이 산재해 있다. 자신의 책임으로 여성 동료의 수술 비용을 부담해줘야 하고 이미 다른 친구에게 빌린 돈도 기일이 밀려 있다. 시카고에 가기 위해 얻어 탄 차에서는 기름값도 내게 된다. 시카고에 가는 이유는 소속사가 음반을 보내지 않은 한 라이브 카페에 직접 자신의 노래를 홍보하기 위해서다. 언뜻 봐도 얇아 보이는 가을 옷을 입고도 애써 안 춥다고 말하는 르윈에게 누나가 "제정신이냐"라고 되물을 만큼 한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지만 일단 르윈은 날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음악을 해야만 연명하는 것을 넘어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느끼는 인물이다.
<인사이드 르윈>에는 서로 닮았지만 다른 두 마리 고양이가 있다. 둘의 궤적도 결국 르윈의 여정만큼이나 눈길을 끈다. 르윈을 따라 문 밖으로 나갔다 르윈의 손에서 놓쳐져 한동안 어딘가를 떠도는 고양이가 있고 다른 하나는 앞서 잃어버린 줄 알고 르윈이 잘못 데려온 고양이다. 한 고양이는 이름이 밝혀지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밤 덤불로 홀연히 사라진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번번이 겉도는 르윈과 달리 고양이들은 아무 집에서도 냉큼 우유를 받아 마시며 사람의 손길도 피하지 않지만,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간신히 서로 닮아 있으면서 르윈의 입장을 은유하기도 한다.
시카고 라이브카페의 사장은 르윈의 노래를 듣기 위해 “네 안의 것을 연주해 보라”라고 주문한다. 이 대목은 영화의 원제("Inside Llewyn Davis")가 언급되는 유일한 순간이자 영화 전체의 여정이 향하는 목적지와도 맞닿는다. 르윈은 단순히 집이 없는 처지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어갈 문을 열어두지 못한 것 같다. 한때 함께 노래하던 파트너는 이미 세상에 없고, 두 사람이 남긴 ‘우리에게 날개가 있다면’이라는 앨범은 르윈에게 지금 날개가 없음을 지시한다. 활발하게 공연을 하는 진을 향해 "돈 벌려고 음악 한다"며 속물이라 몰아세웠던 그가 정작 시카고로 향하는 순간, 그리고 음악이 아닌 또 다른 어떤 결심을 하려는 순간 이야기는 시리고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 나가려는 르윈의 모습을 처량하지 않은 인간으로 보듬는다.
<인사이드 르윈>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코엔 형제는 ‘골목에서 얻어맞는 포크 싱어’라는 이미지 위에 고양이를 얹어 플롯의 결을 세우고, 가능한 모든 순간에 르윈이라는 인물을 가까이서 오래 바라본다. 이름 모를 고양이의 이름이 후반부에 밝혀지는 동안, 르윈 역시 자기 삶의 무수한 모르는 것들 사이에서 마침내 붙잡을 하나의 이름을 더듬어 기타 줄 끝에 감각하는 듯 보인다. 몸과 마음 모두를 관통 중이던 냉혹한 허기를 처음으로 똑바로 응시하고는 이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발을 딛기 시작한다. 그가 밥 딜런 같은 뮤지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내일도 어딘가에서 노래를 계속할 사람임을 조용히 예감하게 한다.
"여기까지야. 지쳤어. 하루 잘 자면 괜찮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어떤 장면에서 르윈이 내뱉는 이 한마디에 마음이 끝내 머무른다. 상실을 겪고 방황 중인 사람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한마디. 자조와 냉담이 고루 섞여 여전히 길을 잃은 이의 고백. 그에게도 금세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너무 춥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계속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그건 어떤 독자들에게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이다.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5년 1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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