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

by 김동진

겨우내 잘 열지 않은 창문틀 아래에는 눅눅하게 말라붙은 물때가 가득합니다. 눈비가 올 때 조금 스미기도 하고 내외부의 온도차로 맺히는 물방울들이 내려와 앉은자리이기도 하죠. 미루고 미루다 창틀 청소용 스펀지와 키친타월, 물티슈 따위를 대충 꺼내 요령 없이 무작정 손바닥에 힘을 가해 봅니다. 몇 번을 훔쳐야 간신히 까만 자국들이 가시고 마른걸레로 한 번 더 마무릴 해줘야 제법 청소를 한 티가 납니다. 여섯 평 남짓의 이 원룸에 산 지는 이제 10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두 번째 자취방이고 그 이전에는 기숙사에서도 몇 해를 보냈으니 이제는 서울로 떠나온 시간이 유년을 보낸 영주에서의 시간보다 길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때를 벗겨내도 공간에 사람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이곳에 제법 오래 머물렀구나 하는 체감과 겹쳐서 되뇝니다. 투박하게 집안일이라도 해야,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쌓거나 쌓인 시간을 쓸어내는 일임을 간신히 알아챕니다.


밀쳐두고 또 흐린 눈을 뜨던 집안일에 마지못해 팔 소매를 걷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해낸 티 나지 않지만 잠시라도 하지 않고 소홀히 두면 반드시 표를 내는 것들에 대해 돌아봅니다. 눅눅하게 쌓인 빨래. 고인 물과 섞인 기름때 속에 제법 미끈거리고 있을 밥그릇과 접시와 수저들. 분리수거해야 할 플라스틱이나 비닐들. 저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아서 간편식이나 밀키트, 배달 등 요리하지 않는 법을 애용하는데 문득 누군가를 위해 식재료를 정갈하게 또는 투박하게 손질하며 모양을 갖추고 시간을 들여 음식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도 종종 생각이 향합니다. 밥, 뜨거운 김이 솟아나고 호오 몇 번을 불어야 겨우 입에 넣을 수 있었던. 흰밥, 김에 싸 먹거나 김치 같은 걸 올려서 숟가락 가득 채웠던.


밥은. 수화기 너머 당신은 오직 제가 식사를 제시간에 제대로 했는지 만이 중요하다는 듯이 언제나 이 말을 시작하는 이야기나 맺는 이야기로 놓습니다. 당신의 "밥은"에는 물음표가 잘 붙지 않습니다. 확인이라기보다, 끝에 따라오는 마침표에 가깝습니다. 네 먹었어요. 먹고 있어요. 대충이요. 먹으러 가는 길이에요. 제 대답은 물론 상황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어 정해져 있습니다. 그날따라 속이 좋지 않거나 업무가 바쁘거나 그냥 배가 고프지 않거나 밥 생각이 없거나 실제로는 뭘 먹지 않았더라도, 혹은 카페에서 밥 대신 조각 케이크나 샌드위치 같은 걸 먹었다 해도 결코 밥을 안 먹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자기 배 채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배가 고프지 않은 게 더 중요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살다 보면 당신 생각을 자주 잊습니다. 이제야 간신히 나잇값은 하고 사는 것도 같은데요, 어제를 보내고 내일을 맞이하면서 1인분의 하루를 마무리하다 보면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찾아옵니다. 단지 버스나 지하철에서 카드와 현금이 두둑하게 담겨 있을 지갑형 케이스 속 휴대전화를 안경을 비스듬히 세운 채 미간을 찌푸리며 들여다보는 중년의 머리 희끗한 아주머니를 볼 때만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은 생활의 오감을 경유해 난데없이 끼어듭니다. 편의점에서 산 찬 우유가 빨대를 지나 목 안으로 넘어가는 동안에는 문득 우유를 그냥 마시면 설사를 해 항상 전자레인지에 데워주셨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동네 반찬가게에서 세 개 9,900원 정도 하는 반찬을 몇 종류 고르다 보면 어릴 적 집에서 매일 먹었던, 앞서 적은 흰 밥알의 뜨겁게 부서지는 질감이 뇌리에 차곡차곡 씹힙니다. 차일피일 넘기던 설거지를 하다 10년 넘도록 함께인 빛바랜 수저와 밥그릇에 묻은 세제 거품을 헹궈낼 때면, 그 졸졸 흐르는 물소리 너머에 본가에서 TV 소리를 방해하고는 했던, 싱크대에 가득 틀어진 물과 함께 식기들이 달그락거리는 장면이 겹쳐집니다. 제가 잊은 동안에도 살아온 내내 당신이 길러준 감각은 이렇듯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찬 우유를 마신다고 해서 화장실에 들락거리지는 않은 지 오래입니다. 기숙사에 살던 때와 자취를 시작한 초기에는 주기적으로 김치며 두부조림 같은 반찬들과 뭉쉘이나 다이제 같은 간식거리 들을 아이스팩 담긴 스티로폼 박스에 가득 채워 박스테이프를 몇 겹은 붙여서 보내주시고는 했죠. 이제는 제가 직접 사 먹는 게 익숙하고도 편합니다.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열심이었던 설거지는 이제 바가지 안에 그릇이 한가득 쌓인 걸 방치하다가 보다 못해 겨우 물을 틀고 손을 움직이는 정도가 되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청소는 여전히 할 수 있는 최대한 내버려두다가 제 방이 더는 사는 곳이 아니라 쓰레기를 모으는 곳처럼 보이기 시작할 때 그제야 주섬주섬 분리수거 시늉을 하고 걸레를 꺼냅니다. 저는 집안일에 꼼꼼하기는커녕 게으르기 이를 데 없지만 잘 치워놓고 사느냐고 물으시면 늘 그렇다고 그럭저럭 둘러댑니다. 저는 당신 생각을 또 다음으로 덮어둡니다. 당신에게서 카톡이나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봐야겠다고, 이제는 더 나이가 들면 왔다 갔다 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당신은 제 업무 시간 중에 바쁘냐 별일 없냐는 말과 함께 서울에 하루 다녀가고 싶다는 이야길 꺼내셨습니다. 괜찮은 주말 날짜를 "니 스케줄 한 번 보고 안 바쁠 때" 알려달라며. 마치 허락을 구하듯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날짜를 겨우 하나 골라 카톡을 보내며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은 제가 할 테니 여기 오셔서 아무것도 하시면 안 된다는 조건이면 오케이. 완전히 쉬러 오셔야 해요."라고 썼습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굴 보여 줘서 고마워 휴무신청해볼게 쉬러갈게


늘 그렇듯 띄어쓰기나 구두점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당신의 눌러쓴 답장에 한동안 가만히 멈춰 있었습니다. 명절이 아니면 정말 일이 있어야 본가에 다녀오는 제게 당신이 서울에 가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답을 구하고 있는 모습에서 뭔가 뒤바뀐 기분이 들었습니다. KTX 왕복 예약을 해 드리고 구글 캘린더에 영주와 청량리를 오가는 열차 시간을 적고 난 뒤 먼저 한 생각은 집에 청소해야 할 게 아주 많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첫소리는 '아, 귀찮아'인 게 1인 가구의 일상에 길들여진 제 몸의 리듬일지도요. 평소에 자주 청소를 했다면 그게 대청소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내 이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청소든 뭐든 아무것도 하시면 안 된다고 조건을 달았고 오시기 전날 재확인까지 했던 것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틈만 나면 걸레나 물티슈를 손에 들며 천장과 가까워 키가 닿지 않는 곳에는 저긴 네가 좀 닦아 보라며 아예 티슈를 저한테 넘기셨을 모습이 아니라 쉬러 온 티를 여실히 내시며 가만히 이불 속에 몸을 구기거나 유튜브로 트로트 영상을 보는 모습이 꽤 낯설었습니다. 무슨 책이 이리 많냐며 안 입는 옷은 정리 좀 하라며 또 어디 먼지가 없나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당신이 아니라, 매번 툴툴거리며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서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제가 아니라, 한번도 찾으신 적 없는 파스타와 맥주를 찾고 여간해선 타지 않으시던 택시를 연거푸 잡자는 당신이 있었고 저는 그 사이에서 지난 추석 이후 몇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가늠해보려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비싸다고 손사래를 칠 만한 한정식집에서 제 돈으로 코스 식사를 대접하고 쇼핑몰과 마트 구경을 같이 하는 일 정도였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밖에서는 핫팩을 손에 쥐여드리면서요.


진아. 당신은 자주 저를 이렇게 부르시지요. '동진아'가 아니라. 그건 마치 여느 이름 끝 글자를 가져올 수 있을 법한 은아 민아 같은 말들처럼 익숙한 구어이지만 당신은 무슨 말을 꼭 작심하듯 할 때 저를 진아,라고 하셨습니다. 진아 근데 있잖아. 진아 얼른 밥 먹어. 진아 이거 좀 봐 봐. 무언가 부탁하려 하거나 물어보거나 혹은 심각한 이야길 꺼내실 때면 제 이름의 절반이 동원됩니다. 그건 마치 제 나이대의 사람이 제게 '김동진'이라고 성과 이름을 전부 붙여 부르는 일의 역할과 비슷한 것 같은데요. 제 이름의 한자 '동(東)'은 돌림이니 그렇다 해도 '진(珍)'은 과연 제게 걸맞은 이름일까요. 누군가의 보배가 될 수 있을까요. 돌아보면 크게 속을 썩인 다음날이면 당신은 못 이기는 척 제게 무언가를 내어주거나 당신의 뜻을 양보하셨습니다. 그 뒤로는 어른이 된 것처럼 흉내내며 퉁명스러워지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모습도 자랑으로 여길 당신을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그와 반대로 작아집니다.


김 과장. 자기 나이쯤 되면 길어야 이십 년이야. 계실 때 잘해. 제가 회사에서 직속으로 모시는 임원인 채 상무님의 가족상에서 상무님은 웃어 보이며 제게 자조적으로 당부하듯 저보다 십수 년 정도 더 살아본 가장의 투로 말하셨습니다.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 사실 지금도 가늠되지 않습니다. 전화 한 통 카톡 하나 시간 내어서 더 하면 되는데 제 뻣뻣한 손은 신작 영화 예고편 영상을 찾거나 보도자료를 읽는 일, 독서모임 에세이를 읽거나 소셜미디어 계정 댓글에 답을 쓰는 일 따위에 더 익숙하네요. 소주 몇 잔을 기울인 뒤 밝은 표정의 상무님과 인사를 하며 씁쓸해진 기분으로 일산백병원에서 집까지 회사 업무용 카드로 택시를 불러 집에 오던 날도 지금으로부터 벌써 네 달은 되어가는데, 저는 그동안에도 당신을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무얼 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캘린더에 의무적으로 적어둔 음력 생일을 맞아 용돈을 부치고 안부 전화를 드리는 정도로 역할을 놓치지 않았다고 위안 삼고는 했지요.


원룸 냉장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알던 시기의 어느 날, 당신이 보내온 택배 박스를 개봉하다 문득 '보낸 사람'에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을 지칭하는 어떤 명사가 대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수식도 없이. 깍두기 이제 다 먹어가지? 메추리알 장조림 오래됐을 테니 아직 덜 먹었으면 그만 먹고 버리고. 제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길어지고 떨어져 산 시간이 늘어나는 대가로 당신의 염려와 보살핌은 결코 줄어들 일은 없었기에 저는 단어 하나로 축약될 수 없을 그 사랑이 무엇일지 아예 모르지는 않습니다. 너무나 크나큰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제 그릇은 언제나 한계를 보입니다. 여전히 연습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삼킵니다.


미루는 일은 진심인 이야기나 사실인 이야길 꺼내는 일을 유예하거나 아예 다른 것으로 가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장기근속 휴가를 받아 며칠을 외국에 다녀왔습니다. 출국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이따금 당신이 전화를 하실 테니 미리 어떻게 말해둘까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겨우 나온 말은 회사에서 며칠 출장을 가게 됐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해외에 한 번 다녀와보지 못한 당신을 두고 도쿄에 여행을 간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잘 다녀와. 실수 없이 잘하고. 윗사람들 잘 모시고. 있지도 않은 출장 이야기에 당신은 차 조심하고 옷 따뜻이 잘 입으라는 흔한 출근길 당부처럼 이런 말들을 덧붙였습니다. 출국하는 동안 무거웠던 마음은 이내 가셨지만, 네. 언젠가 당신을 모시고 이곳에 오면 좋겠다고도 저는 그곳에서 문득 상상했고 그러다 며칠이 지나자 그 생각은 유실물처럼 어딘가 멀찍이 두고 왔습니다.


살아온 관성은 잘 바뀌지 않고 저는 다른 친구나 동료나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어렵습니다. 늘 마음과는 다른 말이 어리숙하게 튀어나옵니다. 늘 염두와 딴판인 스스로를 언제나 넉넉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제 서울살이 근육은 제법 굳어져 이제는 안 하던 다른 무언가를 하려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름만으로 어렵고 떨어져 있어서 더 가닿지 않고 감각이 살아온 세월만큼의 두꺼운 보풀을 입은 탓에 더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입이 잘 떼어지지 않아 손이 대신 쭈뼛거립니다. 안마만큼은 예부터 야무지게 열심이었는데, 주무르는 어깨와 등은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도 보일 만큼 제법 앙상해져 있었습니다. 옆으로 누워 잠든 새벽, 들이쉬고 내쉬는 당신의 아픈 허리를 가만히 보면서 저는 소리 없이 눈가를 손으로 훔칩니다. 눈을 감으면 맴도는 단어들은 당신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었다는 한 문장 곁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 앞에서, 삶을 제일 오래 함께한 사람 앞에서 자꾸만 굳어버립니다. 당신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시작했지만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굽은 등과 작아진 키, 부쩍 빠진 살, 메이크업과 알이 큰 안경으로 채 감춰지지 않는 눈밑 주름과 줄어든 머리숱. 거칠어진 손. 세월을 이기지 못한 당신의 윤곽이 아른거립니다. 당신이 지금 제 나이였을 때 저는 초등학교 육 학년이었는데요, 벌써 머리 큰 십 대 남자아이 둘을 건사하셨을 당신에 비해 저는 제 스스로조차 잘 돌보고 있는 것일까 하고 가만히 비교해 봅니다. 먹어가는 나이와 줄어드는 시간이 서울과 영주 사이의 거리를 멀게 느껴지게 합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당신의 속도에 몇 걸음을 되맞춰야 하는 보폭만큼이나 저는 영영 받아온 사랑에 미치지 못할 응답 비슷한 것만을 돌려드리고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저조차 당신은 더없는 자랑으로 여기실 걸 알지만 어디 내놓기 그저 너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좀 더 못나지 않은 사람일 수 있도록 어떻게든 노력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도 저는 했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또 다음으로 덮어둡니다. 청량리역에서 열차를 태워 보내고 난 뒤 그 헛헛함을 감당하기 어려워 저는 한동안 대합실에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저에게 당신의 뒷모습을 볼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쓰면서 변해가는 나를 만나는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