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달은 늘 어수선하게 지나간다. 수상한 것은 십이월도 마찬가지였고 연말은 주로 그렇지만, 도쿄에 다녀온 뒤로 특히 그랬다. 마치 떠나온 곳에서 더 오래 살아보고 싶었다는 듯이. 일루미네이션으로 가득한 도심 거리를 걷다 보면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흠뻑 잠겨 있던 나날들이었다. 새벽의 사소하고 덧없는 농담들과 먹고 마시던 것들, 편지를 쓰거나 물건을 고르던 시간들도 아직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오늘 감각하는 것들의 대다수는 반드시 지나가거나 사라질 것들이고 생각보다 움켜쥔 채 놓치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은 무력감을 주지만 가끔은 자주 인용하는 노래 가사처럼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다행인 것들이 있다. 이 우연한 시절도 결국은 지나가서 괜찮다고 여길 수 있게 되겠지.
단지 긴 휴가 뒤의 후유증만은 아닐 것이다. 항공사 마일리지가 없어지기 전에 쓰겠다는 것이 계기였지만 실은 생활을 잠깐 벗어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딱 서울과 제주를 왕복하는 비즈니스석 발권을 할 만큼의 마일리지가 있었다. 1월은 신경이 곤두서거나 뒷맛이 개운치 않거나 마음구멍에 계속 걸리는 일들이 제법 있었다. 다 지나가고 나니 걷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어딜 누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공료를 거의 들이지 않은 덕에 다른 씀씀이에 더 거침이 없어졌는데, 차를 렌트하면서도 예전과는 제법 달라진 가격이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나칠 때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어떤 보상이나 사치를 쉽게 허락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아직은 믿고 있다.
8년만에 온 제주다. 렌트한 차를 수령하고 시동을 걸자 그제야 여정이 시작됐다는 실감을 한다. 54,436km. 허 번호판을 단 이 차를 타고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누볐을까. 시간을 품은 차를 끌고 가득 채워진 연료 게이지의 몇 칸이나 쓸 것인가 가늠하면서 목적지를 찍었다. 실은 혼자의 여행에 잠깐의 동행을 덧붙였다. 제주에 사는, 같은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지인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얼굴을 본 건 지난 십일월 말에 콘서트가 있었으니 두 달 만이다. 돔베고기며 갈치조림이며 한상 가득 차려진 반찬들 앞에서 지나온 시간과 노래 가사와 살았던 지역들, 카메라와 이어폰 이야기를 나누고는 커피를 짧게 마시고 헤어졌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난 뒤 차로 한 시간 남짓을 달려 도착한 곳은 독서모임을 같이 한 지인이 몇 해 전에 연 편지가게였다. 보늬밤 디저트와 차를 곁들였고, 누가 읽을지 모를 편지를 한 장 쓰고 난 뒤 사서함에서 봉해진 익명의 편지 하나를 골랐다. 신기하게도 그 편지에는 정말 바쁘게 살아왔거나 남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부터 나를 알아보고 스스로 다독이는 시간을 지내보기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파도에 저항하기보다 물결 속에 유영하기를 응원한다는 말이 1월의 마지막에 어울렸다. 내가 쓴 편지를 언제 누가 읽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익명에서 익명으로, 지구 어딘가에서 언제나 아침이 시작되고 있듯 떠남과 시작을 앞둔 사람들이 띄워온 서신이 계속해서 서로를 경유하고 서로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또렷이 생각했다. 창밖 비닐하우스와 낮은 주택들 너머 무채색이던 하늘에 점차 주홍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편지의 봉투를 봉하고 나니 찻잔의 바닥이 보였고,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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