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위해 또 제주에 와야겠다
친구에게 추천받은 바에서 무알콜 맥주와 감자튀김을 시켜 먹는데 8년 전 LP 바에서 비엔나커피를 마시던 비 오는 밤이 떠올랐다. 여행지에서 술을 마셔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빌리 아일리시와 퀸, 최유리를 오가는 선곡. 나무기둥에 듬성듬성 걸린 밀짚모자와 기름난로. 산장 같은 내부 이곳저곳에 앤티크 한 스탠드나 등불, 통기타 같은 소품이 늘어져 있고 친절한 듯이 무심한 직원이 안내해 준 바 테이블은 대형 스크린이 투사하는 뮤직비디오에 눈을 돌리기 좋았다. 뭔가 알코올을 마시고 싶은데. 아직 저녁 8시 40분경. 시간은 충분하다. 숙소에 간 뒤 다음 갈 곳을 찾아보자. 숙소에 주차한 뒤 습관처럼 다른 바를 검색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을 찾다 보니 몇 개의 바 중 한 군데가 눈에 띄었다. 도쿄에서 귀국 이틀 전에 갔던, 이스트-엔드 패션드 칵테일이 기가 막혔던 깔끔한 클래식 바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말차 올드패션드, 갈치-젓갈 블러디메리 같은 특색 있는 시그니처 칵테일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여기다' 싶은 곳이었다.
지층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매캐한 공기와 연기가 보이면서 만져졌다. 어라 흡연이 되는 곳인가. 다행스럽게도 내 착각이었다. 담배(연초) 냄새가 아니라 시가 향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향은 생각보다 독하지 않았으며, 걸어오면서 지도 앱에서 본 바의 메뉴판에는 시그니처 칵테일 메뉴 중 시가를 곁들이면 어울린다는 칵테일이 있기도 했다. 이것도 공간의 공기를 기억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도쿄 여행 둘째 날 처음 들른 바가 중년의 여성 바텐더 사장님이 차분하게 훌륭한 클래식 칵테일을 제조해 주시고 기본 안주가 소박했던 것과 달리 흡연이 가능한 곳인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러 맨해튼 한 잔만 마시고 나왔던 기억이 스쳤다. 일반적인 담배 냄새가 담고 있는 탄내와 화학첨가물 냄새가 섞인 그것이 아니라, 이 바에서 나는 향은 달큰하고도 묵직한, 흙이나 가죽 따위의 냄새와 다크초콜릿 향이 섞인 듯한 것이었다. 아 이런 게 바로 시가의 향이란 거구나. 공기 속에 천천히 자연스럽게 스며 있어 칵테일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을 때 전해져 오는 향과 조합이 좋았다.
바의 향이 좋으면 공간을 꾸린 주인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막상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의 취향 전반에 대해 한 번에 믿게 되는 종류의 신뢰다. '나 여기 또 오고 싶어'라고 마음속에서 펜을 꺼내 문장을 적게 만드는. 처음 가는 바에서는 항상 올드패션드나 네그로니처럼 클래식 중에서도 말하자면 '그 바가 잘하는 곳인지 가늠할 수 있을 법한' 메뉴를 주문한다. 여전히 위스키나 칵테일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하지만 첫 모금의 맛은 능히 무장을 해제시킨다. 매장에 놓인 피아노와 홀 테이블 한편의 앙리 마티스 그림과 어우러진 밀도 높은 시가 향(바 테이블에 앉은 다른 손님이 피우고 있던) 조합은 코를 자극한다기보다 매장의 공기와 어우러져 향을 천천히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에 가까웠다. 무게감 있고 진하지만 피로감을 주는 게 아니라 고급스러운 풍부함을 자아내는.
바의 인스타그램 계정 게시물 몇 개를 어렴풋이 보니 아마도 사장님이 클래식 애호가이신 모양이었다. 어떤 날은 클래식 음악을 틀고 어떤 날은 팝 음악이나 영화 사운드트랙을 틀어놓기도 한다 하셨는데 하나하나 선곡이 마음에 들었다. 바에 들어선 직후부터 아델와 벤슨 분,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가 연이어 나왔다. 최근에 친구와 이야기했거나 주점에서 흘러나왔거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로 가득 짜 맞춰 채워진 듯한 곡목에 이미 다음 잔을 뭘 시킬까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우연하게 펼쳐진 하루의 예정된 듯한 음악과 향기와 풍미가 어우러지는 순간. 여행지에서의 기억은 때로는 공간 한 군데에서의 찰나의 시간으로 기억되고는 하는데, 8년 만의 제주에서의 기억은 이 바에서의 경험으로 쓰이고 스밀 것임을 직감했다. (2026.02.01.)
낯선 곳에서 걸음 하는 바는 그 자체로 내게 새로운 경험이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위치에 좋아하는 단골 바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울과 도쿄에서 갔던 바를 떠올리자면 제주에 모처럼 왔으니 지역의 색깔이 특색이 담긴 바가 무의식 중에 궁금했었으니까. 하루만 더 있 으면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그렇게 결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늘 이따 또 와야지. 31일 밤에 처음 와 자정을 넘어 이곳에서 하루를 시작했으니, 또 내일 하루도 여기서 시작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다음 저녁을 기다렸다.
두 번째 걸음에서 마주하는 감각은 확실히 더 편안한 쪽이다. 불과 어제 온 바를 다시 왔으니 메뉴판에 뭐가 적혀 있는지도 가늠되고 사장님이 각얼음 담긴 잔을 젓거나 재료가 담긴 셰이커를 흔드는 리듬과 소리도 한층 친근하다. 둘째 날 세리바 방문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하루를 시작한 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하루를 새롭게 맞이하는 시간. 천혜향이며 배 같은 간식거리도 내어주신 건 물론 크림치즈와 크래커와 초콜릿 기본 디쉬는 흔하지 않은 감동이었다. 도쿄에서 했던 말을 여기서 또 중얼거렸다. 여기 너무 좋아. 또 오고 싶어. 다음번 제주에 또 오게 된다면 그 이유의 맨 앞은 바로 여길 또 오기 위해서일 거라는. 렌터카의 기름을 채우고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 오겠다며 공언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어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바의 미닫이 문을 향했다. (202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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