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평범한 봄이 새로 펼쳐질 것이다

영화 '여행과 나날'(2025)

by 김동진

일본에 체류 중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심은경)는 그럭저럭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국문으로 다음 시나리오 초고를 쓰는 '이'의 표정이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아 보인다. 관객으로서의 예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완성된 영화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행사 자리, 감독의 옆자리에 앉은 '이'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각본가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는 한 관객의 질문에 대뜸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는 답변을 한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 이야기를 들은 영화과 교수는 어디 잠깐 여행이라고 다녀오지 그러냐며 바람을 넣고, '이'는 눈이 무릎까지 쌓인 야마가타 현의 작은 마을에 머무른다.


갑자기 떠나온 탓에 걸음한 호텔들마다 빈 방이 없어 여관인지 산장인지 정체가 잘 가늠되지 않는 허름한 산속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된 '이'의 이야기가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2025)의 2부에 해당된다. 마치 '이'가 쓰는 시나리오를 그대로 스크린에 구현한 듯한 1부가 영화의 앞단에 펼쳐지기에 나 같은 관객으로서는 작가가 구상하면서 노트에 쓰는 문장이 그대로 영화로 옮겨지는 광경을 거의 실시간처럼 보는 독특한 관람 경험을 하게 된다. '차 뒷좌석에 여성이 잠들어 있다'라고 노트에 끼적이는 장면 다음엔 실제로 '나기사'(카와이 유미)가 차 뒷좌석에서 눈을 뜨는 장면이 나오는 것. 이러한 배치는 영화 제목에도 지시되어 있지만 여행과 여행 밖 일상, 또는 일상과 일상 밖 여행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눈 덮인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2부와 달리 1부는 한여름 바닷가가 주 무대이기에 두 계절의 풍광을 모두 보게 되는 점이 일단 그렇고, <여행과 나날>은 마치 의도한 듯 둘 사이의 선후 관계(어느 쪽이 먼저 일어난 일인지)를 명시하거나 중요하게 암시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도 넘나든다. 여행은 일상의 연속일까, 아니면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 일상을 달리 보거나 다른 의미로 만들어주는 장치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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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컷


예전에는 어딜 떠나든 돌아올 곳이 있어야 한다고, 쉼의 여정이 소중한 동시에 그것 자체가 너무 낭만과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비행기 직항으로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낮과 밤이 바뀌는 도시에 며칠을 머무르는 동안 나는 언제나 며칠 뒤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곳에는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가족이든 연인이든)이 있다. 놀기만 한다면 내 생활을 잃을 것만 같아서. 몇 년 동안 몇 군데의 도시를 다녀보는 동안엔 이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비일상의 장소에선 어딘가 비일상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갖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근래에는 조금 다른 마음을 갖게 됐다. 1월호 이 지면에서 도쿄에서는 제법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서술했지만 내 휴가는 심상하고 평범했다. 삶의 많은 순간은 평이하고 단조롭다.


<여행과 나날>의 미덕은 '이'가 머무는 그곳에서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숙소 주인이 차려준 식사를 하고 동네를 산책하고 그저 시간을 보낸다. 물론 시나리오 창작의 슬럼프도 획기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웃기고 즐거운 것들로만 삶이 가득 차 있다면 오히려 그게 재미없지 않겠느냐고 마치 세월을 초월한 현자처럼 숙소 주인은 '이'에게 말해준다. 작심하고 훌쩍 떠나온 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어쩌면 대단한 걸 얻고 돌아오는 여정이 아니라는 데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가 창작의 영감이나 전환점을 당장 얻고 돌아온 여정이 아니라 해도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은 어딘가에 분명 남아 있다. 내가 쓸 수 없을 때 강물이 나 대신 뭔가를 쓰거나 그려주고 내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영화 속 스크린이 대신 빛을 쬐게 해 준다. 한 영화에서 푸른 바다를 보다가 새하얀 눈밭을 연이어 목격하고 나니 이 우연하고 헐렁한 하루하루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건 결국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겨울을 나는 동안 그걸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긴 휴가를 다녀오고 긴 겨울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여행과 나날>은 대단한 구원 같은 게 어디 있다고 말하는 대신 이 나날에 몸을 잘 맡기고 흘러가보자고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눈이 녹고 나면 다시 평범한 봄이 펼쳐질 것 같다.


common (5).jpg 영화 '여행과 나날' 국내 포스터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6년 3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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