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속 5센티미터'(2025) 리뷰
"타카키는 분명 괜찮을 거야.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거야."
어떤 이야기는 단지 추억을 환기시키는 걸 넘어 그 시절의 내게 말을 건다. 꺼내지 못한 말들, 했어야 했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말들이 거기 아직 있다. 어떤 사람은 추억을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일상으로 산다. 지금 좋아하는 단어, 풍경, 색깔, 냄새, 그 모든 것들이 그때 생겨났다고. 그때 거기서 바로 당신과 같이.
내게 사랑에 대한 기억들은 모두 성인이 되고 난 뒤 생겨났지만 <초속 5센티미터>(2007)가 그려내고 <초속 5센티미터>(2025)가 찍고 담은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이해되고 저릿하게 아프다. 무언가 두고 온 기분으로 30대의 삶에 접어든 모든 당신들에게. 애니메이션 원작의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하면서도 실사 <초속 5센티미터>는 과거에 매여 살던 주인공의 서사를 현재 시점에서 확장한다. 매우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주고, 확인할 수 없는 안부를 대신 물어주며 아주 오래전 놓쳐버린 무언가를 계속해서 그리워하는 이에게 당신 마음 다 안다고 나도 그랬다고 같은 추억을 공유한 그 사람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대답해 주는 이야기에 마음을 기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느끼던 그 순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것만큼이나 세상에 어려운 일이 또 없을 텐데.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아릿한 마음을 영화가 똑같이 보여주고 울림을 담는 이 특수성이 <초속 5센티미터>의 아이덴티티이자 성취다. 서사와 작법이 훌륭하게 조응하도록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원작이 있는 영화가 실사 영화만의 독자적인 색깔과 방향을 보여주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잔영을 충실히 재현한 덕에 이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포토그래퍼이자 뮤직비디오 등의 영상 연출 감독으로 활약해 온 오쿠야마 요시유키의 이 두 번째 장편에 흠뻑 젖어 2월 마지막 주말을 보내며 어느덧 꽃이 피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음을 상기한다.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꽃잎은 눈처럼 내릴 것이다. 시절의 추억을 품은 채로 겨우 나아간다. 다시 한 번 그 건널목에서 한때의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시답잖은 한 마디 안부라도 건네볼 수 있다면. 실제 인생엔 가정법이 없고 상상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추억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눈이 오면 푹신하고 투명해지는 공기를 좋아하듯, 자판기 음료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누르듯 내 습관과 버릇마저도 어루만져주는 일. 나는 이제 없지만 당신은 분명 괜찮을 거라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추억과 추억 속 시절의 얼굴에게 대신 말해주고는 낮게 부는 바람 같은 대답을 듣는다. 건널목의 차단기는 다시 올라가고, 방금 본 그 뒷모습은 안부 같았다며 거기 날리고 있는 꽃잎의 속도를 느낀다. (2026.02.28.)
"네가 나에게 밝다고 해주었을 때 기뻤어. 타타키가 불러준 내 이름과 그 목소리 덕분에 나는 강해질 수 있었어."
당신이 정말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서 그날의 약속 따위는 아랑곳 않고 그 약속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만큼이면 좋겠다는 마음. 살아서 약속을 기억한 당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별 달리 대단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같은 물음과 응답뿐이어도 좋겠다는 마음. 두 마음 모두가 너무나도 아프게 이해되어서 <초속 5센티미터>(2025)를 어쩔 수 없이 연신 훌쩍이며 보게 된다. 일생을 살면서 수 만 개의 단어를 접해도 한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서는 단 몇 개의 단어만 있으면 되는데, 지나고 보니 그 몇 개조차도 다 잃어버린 것 같아서, 아니 잊어버린 것만 같아서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도 고개를 숙인다. 간절했지만 미처 듣지 못한 말들, 아무리 목을 가다듬어도 끝내 하지 못한 말들, 생각 없이 대뜸 뱉어버린 말들은 평생 부치지 못한 서신으로 가슴 안에 남는다. 무엇을 그리워하는 줄도 모른 채 먼 곳을 보며 누군가를 찾으며 엇갈려버린 시절의 골목을 헤맨다. 다 말하지 않아도 온전히 이해받던 순간은 이제는 일어나지 않는 건지. 얼마만큼의 아픔을 겪어야 너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그런 기적은 앞으로 더 없는 것인지. 무언가 두고 온 얼굴로 반복되는 건널목을 몇 개의 조각에 의지해 겨우 지나친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일상인 것들 속에서. 지금 좋아하는 색깔이나 노래, 맛, 풍경, 시간, 촉감, 그런 것들의 상당수는 온통 내가 스스로 만든 감각이 아닌 너로 인해 생겨나고 스며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무치는 것들을 겨우 부여잡고 별처럼 닿을 수 없는 당신에게 다시 손을 흔든다. 나 이제는 성실하고 절실하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겨우 된 것 같다고.
<초속 5센티미터>(秒速5センチメートル, 2025)
2026년 2월 25일 국내 개봉, 122분, 12세 이상 관람가.
감독: 오쿠야마 요시유키(<앳 더 벤치>(2024) 등)
각본: 스즈키 아야코
출연: 마츠무라 호쿠토(토니 타카키), 타카하타 미츠키(시노하라 아카리), 모리 나나(스미다 카나에), 시로야마 노아(시노하라 아카리 아역), 우에다 하루토(토노 타카키 아역), 아오키 유즈(토니 타카키 고교), 미야자키 아오이(코시미즈 미도리), 키류 마이(미즈노 리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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