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해진다는 것

by 김동진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어쩔 수 없이 깨닫는 건 누군가에게 두 번째 기회라는 걸 부여할 문턱이 점점 높아지고 문의 폭이 점점 좁아져간다는 점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용서되지 않고 다음을 허락할 것도 없을 만큼의 어떤 벽이 있다. 예를 들면 무례함이나 성찰하지 않는 태도나 누군가의 약점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기질 같은 것, 노력 없이 누군가의 수고를 편취하는 일. 그런 걸 볼 때 용납할 수 없다. 나는 그걸 쉽게 무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그 사람의 삶을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누군가의 머리 위에 상상하듯 빨간 줄을 긋거나 체크리스트의 한 줄을 지울 때마다 스스로가 제법 편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더 좁아져도 괜찮을까.


생면부지의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일은 조심할 필요가 있고 그에 상응하는 의미로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신중해야 하건만. 이해에는 한계와 정도가 있다. 사소하게는 길을 걸으며 주변을 살피지 않거나 차도에 들어설 때 차가 오는지 확인하지 않고, 길에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카페에서 자기가 앉은 자리를 치우지 않고, 극장 상영관 안에서 영화 상영 중에 떠들거나 스마트폰 불빛을 밝히는 사람들. 최근 내가 질려 하는 건 최소한의 검색 노력도 없이 구글 검색 결과 첫 페이지에도 나오고 업무 매뉴얼에 정확히 써 있는 내용을 갖고 질문을 쏟아내는 이들이다. 괜찮지 않아 하는 유형의 사람들을 보면 신경질이 난다.


예전엔 정말 화가 날 정도로 그들이 싫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래? 어떻게 자기만 생각하는 걸 넘어 주변에 저렇게 둔감할 수가 있어? 지금도 둔감함은 결코 자랑이 될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저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 어쩌면 상식의 종류도 팔십 억 개 정도는 될지도 모르지 하고 차라리 체념에 가깝게 고개를 젓는다고 할까. 불필요한 분노 대신 어떤 거리 두기에 가까운 영역으로서의 판단을 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에게 어떤 사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딱 한 번 정도만 더 한다. 내게 그것까지 두 번 이상 할 만큼의 아량은 없어서. 내가 스태프로 있는 업무 커뮤니티에서는 이제 내 성의의 기준에 미달하는 질문에 답변해주지 않은 지 좀 됐다. 요즘은 무성의와 무례와 무지가 제법 동일선상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읽고 이야기의 형태를 한 많은 매체를 가까이할수록,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헤아리고자 하는 노력을 끝내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잠언이자 주문처럼 생각하게 된다. 사랑할수록 끝내 이해하려 하고 그 사람의 모든 걸 내 몸과 마음처럼 대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이해의 시도를 자칫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하게 되기 쉽다. 쉽게 절망하지 않고, 혼자서는 자신을 살릴 수 없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위해서. 인생이 살아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차곡차곡 끝내 발하는 한줄기 빛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이해받으려면 먼저 이해해야 하니까. 문제는 누군가에게 너무 공감하려다 보면 결국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누군가의 흠결을 어떻게든 포용하려 이입하다 보면 그중 어떤 사람은 내 이해심을 이용하려 들거나 당연한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가장 마지막까지 믿고 이해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인데, 넓은 의미로 타자의 입장을, 사람들의 모양을, 세상의 구멍과 흠결까지 받아들이려 하다 보면 스스로를 중심에 두기 어려운 것 같다.


사람을 납득하려 하길 포기하는 일이 적어도 문학을, 이야기를 애호하는 일과는 상반되는 가치일까. 그렇지 않은 듯하다. 헤아릴 만한 사람을 보다 힘껏 헤아리고, 옳지 않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과감히 반대편에 설 줄 아는 게 오히려 세상 많은 이야기들이 진짜로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닐까. 정신적, 정서적으로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인물이 그마저 선량하게 보듬으려 하는 이들에게 어떤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대중 서사도 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령 이해받지 못하는 일의 비극만큼이나 그 헤아림이 폭력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선연하게 남기는 <조커>(2019)라든가, 타자를 지나치게 수용하는 일이 스스로의 삶까지 착취해 버리는 풍경을 보여주는 <마더!>(2017) 같은 영화도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이용되기 십상인 선해의 마음. 원치 않는 손님을 환대하고 나를 할퀴는 누군가의 손에 나 있는 흉터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다 보면, 모든 걸 이해하려 드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내면을 보는 일이 곧 그의 선택과 행동까지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으니까.


얼마 전에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의 마음과 사정까지도 끝내 헤아려보고자 고민하는 이에게 단호하게 당신의 마음과 안위보다 중요한 건 없고 당신을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그것 따위는 안중에도 둘 필요 없다고 말해줬다. 그럼에도 이게 맞는가, 뭔가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싶을 때, 스스로에게 더 이상 확신을 갖기 어려울 때는 당신을 믿는 나를 믿으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혹시라도 더 간파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으면 어떡하냐는 그에게 그렇지 않음을 아는 건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당신을 믿고 당신도 내가 같은 상황과 고민에 처해 있을 때 그렇게 말해줄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편협해지는 마음은 곧 편애의 마음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별 달리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릇의 크기와 모양이 나와 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날이 갱신하고 고쳐쓰고 수선하면서 좋은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온 대로를 당연하다고 여기며 안주하는 사람도 안타깝지만 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삶 바깥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뜻이고 이해는 곧 고민의 산물이다.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의 언행에는 숨기거나 가장할 수 없는, 어떤 경향성 내지 패턴 같은 게 있다. 가릴 수 없는 뒷모습처럼 그가 숨 쉬듯 말하는 방식과 행동거지를 몇 번씩 누적해서 보다 보면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주변의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 어렴풋함에는 점점 또렷한 윤곽이 형성된다. 그것의 선예도와 해상도를 관찰하다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에게서는 그와 나 사이 장벽을 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반면 그러한 패턴을 인식하는 일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좋은 의미의 확신으로 벽을 허문 채 향하기도 한다. 내가 불완전하고 미약한 것처럼 그 사람 역시 모든 게 완벽할 수 없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얼마나 속으로 힘들었을까, 같은 말을 문턱도 판단도 없이 끝까지 해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딱 저 사람처럼만 살지 않으면 되겠다,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싶은 반면교사가 너무도 많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형태를 한 것들은 모든 인물이 다 이해받는 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가르쳐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건 끝내 화해되거나 봉합되지 않는다는 것. 끊임없이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대신, 누군가를 끝까지 이해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한 한 미약한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견디며 나아가는지 지시해주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남겨진 인물과 맺어져 버린 결말이, 우리 삶에서 타인의 것에 내 것처럼 이입할 수 있는 순간은 거기까지였다고 인정하는 일마저도 그때의 내 합당하고 자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일러준다. 어떻게든 이해하려던 진심과 다음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선을 긋는 결심은 그러니 서로 모순적이지 않은 것이겠다고 말이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건 모든 사람에게 허물과 편견 없이 동등하게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환상에 가까운지를 점차 깨닫는 과정인 것만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쉽게 선을 긋는다면 그건 그 사람이 지닌 그릇의 크기와 모양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해 신경 쓰지 않기를 택했다는 뜻이다. 반면 어떤 사람의 마음에, 그의 그림자에 오래 머물고 그 사람의 어떤 언행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면 그건 그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인간의 상식과 윤리를 유사하게 지녔다는 뜻이다. 명백히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마음의 저울이 향한다는 걸 느낀다. 상식이 맞는 사람, '구리다'라고 생각하는 게 비슷한 사람의 사정을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것보다 더 애써서 헤아리는 일, 동시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만 이해하는 일이 스스로의 마음에 맞는 길이라는 걸 많이 봐왔다. 그렇게 지킨 에너지를, 지킬 만하다고 믿는 사람에게로 향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좁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불완전하거나 모난 무엇을 발견해도 내게는 그것도 다 괜찮을 정도의 포용심과 아량. 이제는 좁아져버린 마음과 어딘가에 두고 온 듯한 여유를 스스로 쓸어 담으면서 그것만큼은 끝내 잃지 않고 싶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 점점 쉽게 판단하고 두 번째 기회 따위 허락지 않게 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내 소중한 사람을, 괜찮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이 편협함은 내가 보는 세상의 면적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끝내 지키고 싶은 세계를 남기기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블러 처리해 버리는 결연함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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