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Feb 21. 2017

어찌할 수 없는 희망의 낮과 절망의 밤들을 지나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이안

구명보트에 탄 어느 인도 소년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며, 벵골 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지내며 겪게 되는 이야기. 무언가 영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 같은 이야기. 영상미가 아름답다는 이야기. 3D로 만들어진 이야기.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야기.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이야기. 후반에 큰 반전이 있더라는 이야기. 영화를 보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난무한다. 그 이야기들은 영화를 보기 전 당신의 삶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상기의 것들은 모두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를 설명할 수 있는 일부의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 어떤 말로도 정확하게 이 영화를 압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흔한 육하원칙으로 한 줄의 시놉시스를 정리하는 것으로는 본질을 조금도 전할 수 없는 영화가 간혹 있는데, 이 <라이프 오브 파이>가 꼭 그렇다는 것이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얀 마텔의 원작 [파이 이야기](2001)는 영화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작품으로 거론돼 왔다. 원작이 출간된 시점과 영화가 개봉한 시점 사이의 11년 정도의 간극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에 있다. <아바타>(2009)로 일으킨 3D 혁명은 이 영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원작 소설이 주는 감정적 차원의 폭은 영화에서 공간적 차원의 폭으로 이어져 관객에게 생생한 몰입감을 준다.


"나는 일의 순서에 맞추어 형식을 차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가능하다면, 일에 의미 깊은 모양새를 입혀야 한다. 예컨대 당신이 내 뒤죽박죽 이야기를 100장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한 장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딱 100장으로? 하긴 내 별명이 싫은 것도 그 때문이다. 숫자가 영원토록 따라다니는 게 거북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 짓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별 인사를 망친 일이 오늘날까지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다."


원작자 얀 마텔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앞의 두 작품이 쫄딱 망하고 나서 '에라 모르겠다'며 떠난 인도 여행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마치 이 이야기를 실제로 누군가에게 듣고 쓴 것처럼 '파이'를 비롯해 일본 선박회사 직원 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재치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던 바가 원작 소설의 머리말에서 이미 드러나 있는 것이다. '파이'가 정확하게 실제로 겪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어떤 방식의 이야기로 전했으며 독자와 청자는 그걸 어떤 이야기로 받아들였는지를 말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파이'는 "해피 엔딩이군요"라 말하는 '작가'(라프 스팰)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달렸다. 이젠 당신의 스토리니까." 그 앞선 이야기도 중요하다.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원문에 사용된 'better'는 더 나은, 더 아름다운, 그런 걸 의도한 게 아니다. "어느 이야기가 더 당신의 이야기 같습니까?"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맹점은 어느 한 '버전'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여 다른 한쪽의 이야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영화와 소설 모두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는 양쪽 모두 실제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명료하게 따질 수 없다. 게다가 소설의 후반부에는 '바나나가 물에 뜰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중 영화에서 조금 생략된 대화를 통해 '두 이야기 사이의 관계' 그 자체에 무게를 싣는다.


치바: "바나나가 뜨나요?"
(멀리서) "둥둥 뜨는군."
"바나나가 뜨나요?"
(멀리서) "둥둥 뜨는군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오카모투: "네, 그래요. 하지만 오랑우탄을 받치려면 바나나가 아주 많이 필요할 텐데."
"그랬지요. 일 톤 가까이 있었어요. 내가 챙겨야 했는데, 그 바나나가 다 떠내려가 못쓰게 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아파요."

(중략)

치바: "여기 바나나 가져왔습니다."
파이 파텔: "고맙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너무 불쑥 말을 꺼내서 미안해요. 감정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하지만 설마 그 말을 우리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식충 나무라니? 물고기를 잡아먹는 해초가 신선한 물을 만들어내다니? 나무에 사는 바다 설치류라?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걸 당신들이 못 봤으니까 그런 거죠."
"맞아요. 우린 눈으로 보는 것만 믿습니다."
"콜럼버스도 그랬지요.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하죠?"
"당신이 갔던 섬은 식물학적으로 불가능해요."
"파리도 파리끈끈이에 도착하기 전에는 그렇게 말했죠."

(후략)


정리하자면, '파이'가 들려준 두 개의 이야기는 양쪽 모두 완전하지 못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이치를 따질 때 모두 틈이 있다. 일본 선박회사 직원들은 결국 듣기에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택했고, 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어쩌면 '파이'는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아마도 본인이 실제로 겪었을, 제3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바로 이 대목에서 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소설의 몇 가지 중요한 대목을 의도적으로 생략해서 관객들이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가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 싸하게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소설의 일부를 생략하고도 영화는 그 자체로 훌륭하고 완결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만큼 각색이 훌륭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대충 간추려 요약하자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 '이야기들에 대한 영화' 정도가 될 것이다. '나'와 '이야기'의 관계, 그리고 '이야기 A'와 '이야기 B'의 관계, '이야기 AB'와 '이야기 C'의 관계, 그런 것들이다. 만약 침춤 호가 난파된 후 구명보트에 있었던 '사람'이 '파이' 혼자가 아니라 어머니든 요리사든 불교신자든 누구든 더 있었다면, 그리고 그(녀)가 '파이'와 함께 생존했다면, 227일간의 표류기를 두 사람이 들려주는 방식과 그 내용은 결코 같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화자가 달라서가 아니라, 비록 환경과 사건은 같았을지라도 두 사람의 경험은 결코 똑같을 수 없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타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때로는 그 누구도 납득시키기 어렵고, 때로는 오직 나만이 겪은 이야기임에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큰 울림을 준다. 이때 청자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방식으로, 즉 자신이 듣고 받아들인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내가(화자) 말해준 이야기와, 그에게(청자) 전해진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자신이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는 감히 염두에 두지도 않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을 겪어 그것을 이야기로 들려주었고, '그'는 그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겪은 것 같은 정서적 체험을 통해 받아들이게 된다.



나도 모르는 내 속의 언어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리고 내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정확히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는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타인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의 순간을 함께 하며, 마침내 자신이 이야기가 된다. (팀 버튼의 <빅 피쉬>(2003)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사냥꾼과 호랑이 중 누가 '리처드 파커'인지, '파이'가 정말로 호랑이를 길들였는지 와 같은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제목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희망의 낮과 절망의 밤들을 지나, 결국 만들어지는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어찌할 수 없는 희망의 낮과 절망의 밤들'은 뭐란 말인가. 영화의 중후반, '파이'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어느 섬에서 겪는 일들을 보여주는 일련의 시퀀스가 있다. 섬에 도착한 '채식주의자 파이'는 해초들을 뜯어먹으며 그 개체 수도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미어캣들을 발견한다. 침춤 호의 침몰 후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편안함과 황홀함을 겪으며 섬에서 맞이한 어느 날 밤, '파이'는 그 섬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아침이 밝을 즈음, 나는 암울한 결정을 내렸다. 이 살인마 같은 섬에서 육체는 편하고 정신은 죽은 쓸쓸한 반쪽 인생을 사느니, 내 삶을 찾아서 여길 떠나 죽는 편이 낫겠다고. 나는 맑은 물을 채우고, 낙타처럼 마실 수 있는 만큼 마셨다. 종일 더이상 못 먹을 만큼 해초를 양껏 먹었다. 미어캣을 물품함과 배 바닥을 꽉꽉 채울 만큼 죽여서 간수했다. 손도끼로 큰 해초 덩어리를 잘라서, 밧줄로 배에 묶었다."


이 대목은 '파이'가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순간이며, 동시에 어떤 힘찬 의지를 다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영화와 소설 모두, 이 대목은 실제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게 연출/서술해놓았다. 그러니까 꿈이라고 하면 좋겠다. 내가 꾸지 않고 '파이'가 꾼 꿈이지만, 보는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꿈처럼 몽롱하게 다가올 수 있는 꿈. 앞선 인용 부분에 드러난 것처럼 이 '식인 섬'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수 없는 섬일 수도 있고,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채 '파이'가 처음 발견한 '부유하는 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아마도 눈치챘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특정 장면, 특정 장면에서의 특정한 물체, 그런 디테일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을 찾음으로써 완성되는 영화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너무도 많고, 이해했더라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들도 너무나 많다. 그런 것들을 겪고 나면 누군가에게 들려줄 나만의 이야기가 생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자신이 겪지도 않은 것들에 웃고 울며 여운을 느끼곤 한다. 언어를 초월하는 경험은 이렇게 완성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어딘가에, 어디든 숨어 있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희망과 절망을 모두 안겨주며 또 살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삶은 흔히 여행에 비유되곤 한다. 그래서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믿으며,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직접 겪으며, 또 겪지 못한 것들에 눈물 흘리며, 그 눈물들로 내일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과 '사이'가 아닐까. 삶을 써 내려가는 '이야기의 신'이 있다면 그건 분명 자신이다. 그러나 그 삶이 속한 우주에는 '이야기의 신'도 어찌할 수 없는 초자연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전하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꿈같은 체험(IMAX 3D로 본 눈 삽니다!)은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답다. 잔혹하지만 희망적이다.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도 마음은 요동친다. (★ 10/10점.)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이안

2013년 1월 1일 (국내) 개봉, 127분, 전체 관람가.


출연: 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라프 사팰, 타부, 아딜 후세인 등.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