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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5. 2017

인물을 관찰하는 영화와 주시하는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문라이트>

어쩌면 삶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있다. 드라마는 정말로 스크린 너머로만 만나볼 수 있는, '일상이 대체로 배제된' 각본에 가깝다. 여기, 삶의 그 속성들을 탁월하게 통과하는 두 영화가 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2/15 국내 개봉)는 상실이 주는 상처를 바라본다. <문라이트>(2/22 국내 개봉)는 존재 자체가 주는 아픔을 끄집어낸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영화 속 모든 장치들이 관객(즉, 장르의 상업적 특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상황에서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즉, 영화의 인간적 진의)를 보여주는 목적으로만 쓰인다는 데 있다. 이는 백인이나 흑인, 이혼남이나 게이와 같은 단어들의 외면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캐릭터'의 고유한 모습이다.


다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표면적으로 명확한 것은 플래시백의 유무라 할 수 있는데,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리'가 바로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정확하게 투영하는 장치로 플래시백을 택한다. 죽은 형의 대리인을 찾아가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양육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리'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패트릭'의 어릴 적 기억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다 대리인이 과거 이야기를 살짝 꺼내는 순간 '리'의 기억은 바로 그 과거로 향한다. 이 과거는 '리'의 현재의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을 만큼 충격이 큰 것이어서 '효과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중반 이후에 배치되었을 법한 장면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효과를 포기하고 인물 자체를 주목하여, 그의 모습을 1인칭(과거)과 3인칭(현재)을 오가며 '관찰'하기를 택한다.



<문라이트>가 온전히 인물의 성장과 성숙만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3개의 챕터에서 모두 인물의 존재 자체만으로 발생하는 아픔들이 있기 때문이다. '리틀'에서는 남이 선택한 삶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게 되고, '샤이론'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불편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며, '블랙'에서는 마침내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자신의 곁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주었던 이들이 더 이상 전처럼 함께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만 '샤이론'은 이제 힘 없이 포기해버리지는 않을,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을 만큼의,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곁에 누군가 있지는 않아도 일정한 거리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에 안도를 얻을 만큼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의 단단함과 당당함을 갖추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조차 꺼려하던 그는 "이게 바로 내 삶"이라고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앞서 명기한 '존재 자체만으로 발생하는 아픔'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정말로 '샤이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사회적, 구조적 시선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마을 사람들이 '리'(케이시 애플렉)를 보는 관점을 일부 반영하기도 하지만 ("그 유명한 '리 챈들러'?") 인물의 상처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면, <문라이트>에서 '아픔'으로 분류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흑인'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과 '게이'를 받아들이는 외부의 관점에서 나온다. 다만 <문라이트>라는 영화 자체를 단지 '흑인 퀴어 영화' 정도로 간편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샤이론'(에쉬튼 샌더스)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물론 흑인이기 때문이 아니며, 그는 학교에서 주류 집단에 끼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인물이며, 그 정체성은 무시와 괴롭힘을 당하는 요인의 전체가 아닌 일부다. '후안'(메허샬레하쉬바즈 알리)과 '테레사'(자넬 모네)와의 관계, 그리고 '케빈'(자렐 제롬)이 나름대로 주류와 괴리되지 않는 방식을 찾은 인물이라는 점이 나머지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의 꿈속 장면과 후반부의 마지막 쇼트 하나 정도를 제외하면 시간적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다. 대신 음향과 촬영의 초점을 바꾸는 방식을 통해 인물의 상황을 대변한다. 주로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감정보다는, 상황 자체(예: 어릴 적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이 밖에서 위협해올 때)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드러내는 쪽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라이트> 속 '리틀', '샤이론', '블랙'의 각 챕터는 캐릭터의 특성과 챕터 자체의 톤,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들의 양상이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이것들이 한 편의 삶으로 조금도 이물감 없이 녹아드는 데에는 그 사이의 여백이 주효하게 작용한다. 여기서 각 챕터 사이에는 적어도 몇 년의 시간적인 간극이 있는데, <문라이트>는 그 간극을 공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만으로도 그 틈을 관객이 스스로 채울 수 있을 만큼의 감정적 깊이로 능히 주시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아픔을 관찰하고, 그럼에도 삶이 살아진다는 성찰을 담은 영화였다면, <문라이트>는 한 사람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아픔들이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게 삶을 어떻게 이끄는지를 주시하는 영화인 것이다. 전자가 막대한 죄책감을 안겨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조금씩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가며 결말의 '나'를 형성한다면, 후자는 타인과 사회에 타협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조금씩 '나'를 형성해나간다고 할 수 있겠다. 내면을 관찰하는 영화와, 관계를 주시하는 영화로 나름의 정리를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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