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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2. 2017

관계를 들여다볼 줄 아는 영화의 미덕

<눈길>(2017 개봉), 이나정

최근에 본 일련의 영화들이 탁월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감정이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 그 자체에 있었다.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전에 스스로 격앙되어 있는 영화는 도리어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기교와 자극 없이 담담한 영화일수록 전달력은 오히려 뛰어나다. 다만 소재에 따라서, 특정한 관객(예: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하는 우리)에 따라서는 화법의 방식과 관계 없이 특정한 방향의 감상을 남기기가 쉽다. (영화로 다루기 민감하고 주의가 요구되는 소재가 있는 이유다.)



아무리 소재가 필연적으로 민족성을 띠고 있다 한들, 공분을 인공적으로 조장하기만 하는 영화는 휘발성이 강하다. 특정한 작품을 예로 들지는 않겠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가장 먼저 생각날 한 영화가 있을 것이다. '꿈 많고 꽃다웠던 소녀'라는 정형화된 이미지와 그들이 겪은 고난과 고통을 (다소 폭력적으로) 전시하는 데에 급급했던 영화들은 '그러한 과거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감흥도 전해주지 못했다.


2부작 드라마를 스크린으로 편집해 옮긴 <눈길>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그때, 그분들과 우리, '종분'(김향기)과 '영애'(김새론), '종분'(김영옥)과 '은수'(조수향)의 관계로서 소재를 풀어갈 줄 아는 영화로 여겨진다. 춥고 험난한 길인 동시에 관점과 감상에 따라 따뜻하고 포근한 길이 될 수 있기도 한 '눈길'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중의적인데, 고향과 같은 상징적 장소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두 지점 사이를 내다보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라는 의미다. 그 두 지점은 바로 일제의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1944년의 조선과 21세기의 '우리'가 된다. 이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결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현재형의 물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길>의 '종분'과 '영애'는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기약도 없는 환경에서 유일하게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동반자이자,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는 계기와 동기를 부여해준 관계였다. 여기서 '종분'이 '영애'를 대하는 모습은 훗날 현재의 그녀가 '은수'를 대하는 모습에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노년의 '종분'은 과거 자신들에게 몹쓸 짓을 했던 이들의 모습을 '은수'를 경찰서에 오게 만든 이들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전기를 끌어다 쓰며 담뱃불을 붙여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위로의 역할을 한다.


'종분'의 과거 시점과 현재 시점을 번갈아 훑으며 국가 유공자에 대한 정부의 처우,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자세, 관계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들을 <눈길>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담아내며 무난한 흐름을 보인다. 다만 서사에 있어서는 어떠한 역할도 부여되지 못하는 인물에 의미와 감정을 위해 장면을 할애한 경우들이 눈에 띄는데,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헌병의 캐릭터가 그렇다. '종분'과 '영애'의 관계만을 위해 두 사람 '바깥'에 있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제외된 모양새다. <눈길> 속 주요 인물들의 관계는 한 편의 영화로서보다는, (영화 속)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로서만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고무적인 동시에, 스크린에서 '관람'하는 경험으로서는 미약한 아쉬움을 남긴다. (★ 6/10점.)


<눈길>(2015), 이나정

3월 1일 개봉, 121분, 15세 관람가.


출연: 김영옥, 김향기, 김새론, 조수향, 서영주, 장영남 등.


제작: KBS

배급: (주)엣나인필름,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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