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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07. 2018

색다른 시도와 의미를 남긴 이 영화에 대한 생각들

<염력>(2018), 연상호

영화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일종의 접두어 중에서 '한국형'이라는 게 있다. 한국형 항공모함, 한국형 미사일, 한국형 느와르, 한국형 히어로, 한국형 판타지, ... 단지 정보성 내지는 비교나 구분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이 말을 접할 때마다, 그 속뜻과 별개로 나는 여기에 어떤 자조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왔다. 이를테면 '히어로 영화' 같은 것의 기준을 외국의 그것으로 상정하고 한국의 것은 스스로 그것과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다. 물론 송경원 기자가 [씨네21] 1141호에 실은 <강철비><신과함께-죄와 벌><1987>의 비평에서 인용한 영화학자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한 국가의 영화들은 그 나라의 정신성을 반영한다"라는 말처럼, 이는 굳이 '할리우드를 따라가지 못한다' 식의 열등감이나 비하적인 의도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장르나 소재도 어디서 누가 만들고 다루느냐에 따라서 자연히 다른 결과물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는 분명히 '한국 영화'만의 특수성 혹은 독자성이 있다.


다만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영화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연간 한 자릿수의 편수를 극장에서 관람하는 일반적인 관객에게 영화의 표준어라 할 수 있는 화법은 대중에게 오락과 쾌감을 주는 상업영화의 문법이고, 그 관념화된 틀(물론 할리우드 영화를 이른다. 장르적 도상이 실질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과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 그 영화는 '이상한 영화'로 회자되곤 한다. 뚜렷한 갈등 구조와 발단에서 해소로 이르는 흐름, 명확한 캐릭터와 메시지, 장르에 따라 수반되는 액션이나 음악, 영상 등의 요소 중 일부라도 관람 전의 기대로 인해 형성된 (이전에 관람한) 유사작과 상이하다면 관객이 낯설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무조건적인 상대주의의 관점으로 모든 다양성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나로서는, 일찍부터 영화를 '그냥 잘 보는 것'과 '조금 더 잘 보는 것'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피로를 잊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오락으로서 영화의 기능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존중받아야만 한다. 게다가 그것 역시도 영화를 온전히 즐기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같은 영화를 보고도 '재미있었다', '슬펐다' 내지는 '별로였다', '노잼', '쓰레기' 등과 같은 단편적인 선의 감상에서 그칠 것인지, 나아가 무작정 1점과 10점의 양극단으로만 표현할 것인지. 아니면, 그 영화에서 특히 재미있게 다가왔거나 인상적이었던 요소나 장면 혹은 대사,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쉽게 느꼈거나 만족스럽지 못했던 점을 감상에 좀 더 녹여낼지의 여부. 상술한 '조금 더'의 차이는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물론, 정답은 없다. 정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게 영화나 문학과 같은 문화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다. 그러나 비판이 아닌 비난과 비하, 혹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영화가 의도했을 거라고는 영화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극단적인 반응 - 거칠게 예를 들면 '<강철비>(2017, 양우석)는 뼛속까지 슈퍼초울트라빨갱이 영화다!' 같은 표현까지도 (그에 따른 합리적 논거나 사유가 부연되지 않는 이상) 그 자체로 존중해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이미 타자나 대상에 대한 존중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염력> 스틸컷
<염력> 스틸컷


최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염력> 역시도 온라인 공간에서 일부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떤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혹평에 시달리거나 금세 인기를 잃고 경쟁작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흔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염력>을 보고 나서, 이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마땅한 영화인가에 관해서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우선 되짚을 것은 <염력>의 장르다. 이 영화를 단지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 정도로 간단히 정의한다면 과연 충분한 설명이 될까. 따지자면 전체의 1/5 정도에 불과한 설명이 될 것이다. 초능력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이며 그 능력을 얻게 된 인물은 그 소재를 보여주기 위한 전달자로서의 캐릭터에 가깝다. 영화가 지명이나 사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재개발로 인해 상가가 허물어지게 되고 땅 주인이 된 건설사 혹은 시공사의 사설 용역업체 직원들이 난동을 부리거나 하는 설정은, 한국 영화에서 제법 빈번하게 등장한다. (비교적 최근작 중에는 <아이 캔 스피크>(2017, 김현석)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아이 캔 스피크>와 <염력> 모두 재개발 이슈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장치로 영화에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두 영화 속의 재개발 이슈 모두 각자의 초반부가 주는 인상에 비해 서사에 일정 부분 이상으로 활용되지는 않는다.)


재개발과 관련한 문제들이 <염력>의 이야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여긴 까닭은 대기업 혹은 용역업체나 그에 결탁한 공권력의 얼굴이 단지 선악의 구도로 투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국가 그 자체가 능력인 사람들", "우리 모두 노예"라는 '홍상무'(정유미)의 대사가 직접적이다. 실제로 '민사장'(김민재)이나 용역업체 아르바이트 직원이나 경찰 등 바리케이드를 가운데 두고 싸움을 벌이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묘사된다. 게다가 염력을 얻게 된 '석헌'(류승룡) 역시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초능력을 그다지 압도적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데, 오히려 더 눈에 띄는 건 아직 그것에 익숙해지지 못한 그가 얻어맞거나 땅에 떨어지는 '반작용'들이다.


<염력> 스틸컷


그가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는 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더 눈여겨볼 것은 그가 계속 날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이나 '수퍼맨'처럼 자유롭게 활공하는 모습을 상상한 관객이라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이는 <염력>이 스스로 다루는 초능력 자체에 일정 수준의 제한을 두었다는 의미인데, 결과적으로는 영화가 '염력'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 혹은 상징적으로 그런 능력을 가진 채 세상을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는 이들의 몰락을 속으로 염원하는 게 아닐까.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해소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해피엔딩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결말을 통해 <염력>은 우리가 여전히 아픈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염력> 스틸컷


그렇다면 <염력>은 <크로니클>(2012, 조쉬 트랭크) 같은 '안티 히어로' 영화인가. 결국 부녀 관계에서 서사의 힘을 얻는다는 점을 빼면 일정 부분 그렇다. '코미디' 영화인가. 영화의 톤을 가볍지 않되 어느 정도 풍자적인 함의를 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히 웃기려는 영화가 아니라 '블랙코미디' 쪽일 텐데, 그러려면 실질적인 악역인 '홍상무'가 무게감 있는 캐릭터여야 한다. 정유미의 연기에 힘입어 '홍상무'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염력>은 그녀를 끝까지 활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영화가 날선 유머를 부리는 가운데 시종 의도적으로 잃지 않고 있는 일말의 온기는, 되려 메시지의 전달력을 떨어뜨린다. 결국 <염력> 역시도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의 상황을 보듬고자 하는 최근 한국 영화의 경향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만 활용되는 소재, 일관되지 못한 채 모호함을 유발하는 장르적 톤은 <염력>의 이야기가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주연 배우들이 제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음에도 상업 영화로서는 상당 부분 스스로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재난을 다루는 태도가 명확하더라도 소재와 캐릭터를 활용하는 모호한 방식은 콘텐츠를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관객에게는 불친절하게 다가온다.


<염력>의 다른 부분은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용인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내게 걸린 건 이것 하나다. 구조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이는 영화가 실질적으로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친다는 것이다. 극영화는 주인공이 있고 그/그녀가 겪는 특정한 사건이나 갈등, 변화로 인해 서사가 전개되며, 나아가 그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는다. 그러니 앞의 문장은 일견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른 문제는 여기서 나온다. 절대적 선악이 아닌 모두가 시스템 하의 부속품이거나 심지어 노예일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초자본적인 힘에 맞서는 소시민들은 무력하다. 그런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정도의 저항을 할 수밖에 없는 '철거민'들 상당수는 배역 상의 이름이 없고 영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석헌'과 딸 '루미'(심은경)의 관계에 의해 희석된다. 변호사 '정현'(박정민) 역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소모적인 캐릭터다. '석헌'이 자신의 염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계기가 '그동안 못했던 아버지 역할을 좀 더 잘 해보기 위해서'라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소재와 개인적 서사의 결합이 <염력>에서는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다. 또한 충분한 이야기를 납득시키기에 101분은 너무 촉박하다.


되짚어보면 <염력>은 주인공이 초능력을 얻게 되는 계기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볼 법한 (그 능력에 관한) 박사나 전문가도 나오지 않는다. 악당을 명확히 혹은 더 강하게 상정하고 그 대상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영화도 아니다. 엄밀히 살피면 캐스팅에 있어서는 최근의 다른 한국 영화에 비해 확실한 티켓 파워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만약 '이번엔 초능력이다!'라는 카피에 걸맞게 초능력을 더 확실하고 비중 있게 활용하거나, 비극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치유에 대한 염원을 관객에게 더욱 주입시키거나, 더욱 초월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악을 등장시키거나('홍상무' 역시도 누군가의 아래에 속한 자라는 점에서). 아마도 셋 중 하나 이상이 더 부각되었다면 <염력>은 박스오피스에서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염력>의 최종 관객 수는 100만 명을 간신히 넘거나 혹은 그 아래 선에서 마무리 될 전망이다.)


<염력> 촬영현장 스틸


그러나 나는 지금의 <염력>을 칭찬하거나 지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영화가 내게 남긴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풀어 보거나 의미를 되짚어 볼 용의가 충분하다. 연상호 감독의 전작인 <부산행>(2016)이 확실한 소재와 명확한 방향성으로 잘 만든 축에 들 만한 상업 영화였다면 <염력>은 그 지향점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이 작품이 온라인상의 일부의 반응들처럼 처참한 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 시도는 어쩌면 2년 전 전작보다도 먼저 목적지에 와버린, 시대를 앞선 작품일지도 모른다.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곳에 불시착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대중의 입맛을 획일화, 단순화 시키는 흔한 기획 영화들 가운데서는 분명히 환영할 수 있는 시도라고 본다. 그저 '한국형 수퍼히어로 영화' 정도로 이 영화를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는 영화다. 최근 편의적으로 남용되고 있는 '신파'라는 단어처럼 말이다.


요컨대, <염력>은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거나 탁월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글은 <염력>이 '염병'할 영화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것은 석연치 않다는 의문 하나에서 출발했다. 전체의 결과물이 썩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생각하고 소화할 수 있는 거리들은 충분히 던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염력>은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가 보여주고 싶었거나 고민했던 지점들을 만화처럼 풀어놓았다. 이 초현실적 소재와 현실적 문제의 만남에 대해,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이 영화를 100만 명이 본다면, 거기에는 100만 가지의 감상들이 있어야 한다. (★ 5/10점.)



<염력> 티저 포스터

<염력>(2018), 연상호

2018년 1월 31일 개봉, 101분, 15세 관람가.


출연: 류승룡, 심은경, 박정민, 김민재, 정유미 등.


제작: (주)영화사 레드피터

제공/배급: NEW


<염력> 초능력 포스터 2종


**한국 영화 최초로 스크린X캠을 촬영 단계에서부터 도입했다고 한 것에 비해, 'Screen X' 상영 포맷의 비중이나 활용이 특별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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