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르윈>(2013), 코엔 형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아마도 이야기의 시작인 것처럼 자연스레 관객에게 받아들여질 첫 장면이, 사실은 앞이 아니라 뒤에서 짓궂게도 일부분을 잘라낸 것이라는 바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 잘려나간 것들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잘리지 않은 것들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사이드 르윈>(2013)의 감상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처음과 마지막에 공통으로 들어간 대목 중 하나는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삭, 이하 '르윈')가 공연을 하고 나서 정장을 입은 어떤 남자에게 영문도 모른 채 구타를 당하는 모습이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밝혀진다) 첫 장면에서 '르윈'이 아파트에서 눈을 뜨는 두 번째 신으로 곧장 넘어가는 것을 보며 이런 일 따위는 그의 일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얻어맞은 '르윈'이 (실제로는 구타를 당한 다음 날이 아니지만, 적어도 앞부분에서 관객은 그렇게 느끼게 된다)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다. 고양이가 있는 골파인 교수의 집인데 하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문이 잠시 열려 있는 동안 고양이가 먼저 나가버리고, 열쇠도 없이 문이 잠겨버린다. '나가버리고', '잠겨버린다'라고 불행한 일인 것처럼 적었지만 이는 과장이 아니다. <인사이드 르윈>은 정말 설상가상의 연속이다.
(*영화의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내용이기는 하지만, 실은 알고 보더라도 이 영화의 특성상 그다지 지장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 영화는 관객을 우울하게 만들고 주인공도 추락을 거듭하기만 하는, 글자 그대로 불행한 내용의 영화일까.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사이드 르윈>의 핵심은 그 모호함 혹은 둘의 사이에 있다. 포크송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지만 고양이 이야기로 먼저 꺼내야겠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고양이는 두 마리가 등장한다. 한 마리는 후반에 이름이 밝혀지게 되는 '율리시스'이며, 다른 하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영화에서 알려지지 않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름이 없다. 서로 다른 고양이지만 같은 종에 외모도 비슷한 탓에 '르윈'에게는 한 마리로 취급되는데, 결론적으로는 두 고양이의 여정이 사실상 '르윈'이라는 인물의 그것과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같은 고양이인 줄 알았던 '르윈'의 착각은 유의미하다.
'율리시스'는 영화에서 집을 총 두 번 나간다. 한 번은 '르윈'이 골파인 교수의 집을 나설 때, 다른 한 번은 '진'(캐리 멀리건)의 집에서 '르윈'이 창문을 열었을 때다. 앞의 것은 '르윈'을 따라나서는 것이자 그로 인해 '르윈'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며, 뒤의 것은 '르윈'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어딘가를 떠도는 것이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율리시스'를 안고 한동안 돌아다니지만, 뒤에서 '르윈'은 한동안 '율리시스'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가 찾게 되는 대목은 (실제로는 찾은 게 아니라 그렇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놓고 간 기타를 찾기 위해 '진'을 다시 만났을 때다. 앞에서나 뒤에서나 '르윈'은 주소가 없지만, 그것보다는 '르윈'이 시카고로 떠났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르윈'이 '진'을 만난 게 그가 시카고로 떠나기 전날이기 때문이다.
'르윈'의 일주일은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상하거나 불행한 일들로만 가득하다. 시카고로 동행하던 '조니'(가렛 헤드룬드)가 갑자기 경찰관에게 끌려간다든지, 한밤중에 도로에서 고양이를 친다든지, 누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버리라고 했던 자신의 물품 안에 항해사 자격증이 들어 있었다든지 말이다. 게다가 그의 대화는 늘 다른 사람들과 쉽게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그는 그저 지쳐 있고, 자신에게 현재 주어져 있는 이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며, 당장 먹고 잘 곳이 필요하다. 어쩌면 '버드 그로스먼'(F. 머레이 아브라함)가 "르윈 데이비스의 내면에 있는 것을 연주해 보라"(영화의 타이틀이 나타나는 유일한 순간이다)라고 말하기 전까지 그는 정말로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인물로 보인다.
'르윈'에게는 같이 노래하던 파트너가 있었다. 그런데 그 파트너는 영화의 시작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고, 시카고로 향하던 중 '롤랜드'(존 굿맨)와의 대화를 통해서야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두 사람이 함께 냈던 앨범 제목은 하필 '우리에게 날개가 있다면'이다. 날개 잃은 '르윈'이 일주일 동안 겪는 일은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날개뿐 아니라 다른 것들까지 잃어가는 과정이다. 자식을 잃었다는 (있는 줄도 몰랐지만) 것이 밝혀지고, 시카고로 향하던 중 운전사가 사라져 히치하이킹을 하게 되며, 가족과도 소원하며, 항해사 자격증을 잃어버린다. 고양이를 살필 마음의 여유와 용기 따위는 없다. 누나 앞에서 태연히 "별로 안 춥다"라고 말했던 '르윈'은 '진'에게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지쳤다고 말한다.
시카고로 가기 전날 '르윈'은 '진'에게 돈 벌기 위해 음악 한다며 속물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정작 '르윈'이 시카고로 떠난 건 '버드 그로스먼'의 눈에 들기 위해서다. 뉴욕을 벗어난 이 여정은 시작부터가 모순이자 자기 기만적인 행위다. 시카고로 향하는 차 안에서 사람들은 포크송을 음악 취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요즘 누가 조지 워싱턴 브리지에 가냐'라고 '르윈'의 파트너까지 무시한다. 자신의 음악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러면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차에 몸을 실었던 '르윈'의 여정은 이미 여기서부터 조짐이 좋지 않다. 온갖 이상한 일들을 다 겪고 나니 정작 "돈은 안 되겠군"이라는 '그로스먼'의 말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 '좋은 충고'로 다가오고, 파트너가 있어야겠다는 말은 오히려 '르윈'이 지금 있는 자리가 떠나온 자리이며 지금 떠나온 곳이 그가 있어야 할 곳임을 상기시킨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마지막에는 있는데 처음에는 없는 것은, 바로 '르윈'이 파트너와 함께 불렀던 'Fare Thee Well'을 혼자서 부르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있는데 마지막에는 없는 것은,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르윈'이 낯선 남자에게 얻어맞는 이유 자체는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제 '르윈'은 적어도 파트너의 빈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바랐지만 엔딩에 이르러 그의 노래는 스스로의 과거에 전하는 회고처럼 들린다. 공연을 보러 온 이들의 얼굴을 숨김으로써 영화의 카메라는 오롯하게 '르윈'을 향한다. 처음과 마지막 모두에 들어간 장면은, 다시 말해 영화의 처음에 영화의 마지막 중 일부를 넣어둔 것은 이 일주일의 이야기가 실은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될지도 모르는 이야기임을 내비치는 동시에 두 번 들려오는 'Hang Me, Oh Hang Me'의 각각의 느낌과 결을 달리하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선형적인 일주일을 순환적인 일주일로 만들어 이야기의 여흥을 더한다.
'어느 골목길에서 누군가에게 영문도 모른 채 맞고 있는 포크싱어의 이미지'를 떠올린 코엔 형제는 '플롯이 다소 밋밋해 보인다며 슬쩍 고양이를 추가'하더니 영화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르윈 데이비스'라는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거나 관찰한다. 게다가 '르윈'이 이름도 모른 채 떠안고 다니던 고양이의 이름이 마침내 밝혀지는 순간, '르윈' 역시도 그간의 여정을 계기로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영화적 마법을 선사한다. 초반부 '진'에게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고양이냐?"라고 했던 '르윈'의 대사를 떠올려보자. 그는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장 피부 속까지 혹독하게 닥쳐온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그는 몸이 머물 주소만 없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뉴욕을 떠나 시카고로 떠났다가 다시 뉴욕에 돌아온 순간, 항해사 일을 할 수단마저 막힌 순간, 때마침 알게 된 고양이의 이름은 '르윈'에게 지난 며칠 간의 일들을 지하철 창밖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역명들처럼 상기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었고 무엇을 어떻게 도맡아야 하는 줄도 몰랐던 '르윈'은 우연히 떠맡은 고양이 '율리시스' 덕에 결과적으로 ('짐'(저스틴 팀버레이크)으로부터) 며칠 연명할 돈과 ('알'(아담 드라이버)로부터) 며칠 묵을 방을 얻는다. 그리고 '율리시스'인 줄 알았던 길고양이로 인해 자신이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일생의 많은 것들을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르윈'의 마지막 대사는 "또 보자"라는 뜻의 프랑스어 "au revoir"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속 '르윈'의 다음 날, 여덟 번째 날을 알 수 없다. 다만 옅게 미소를 머금은 '르윈'의 얼굴과, 때마침 흘러나오는 밥 딜런의 곡 'Farewell' 만이 남는다. 그가 밥 딜런은 아니지만, 그리고 여전히 그는 주소가 없지만, 뭔지도 모르겠는데 자신을 괴롭히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 투성이었던 '르윈'의 삶에는 이제서야 '아는 것'이 생겼다. 이 삶의 미래가 희망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내일도 뉴욕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리라는 것은 능히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르윈'은 포크송이 거기서 거기라며 여유 있게 농담을 던진다. 그 대사의 원문은 "If it was never new, and it never gets old, then it's a folk song."이다. 새롭지도 않지만 낡지도 않는 것. 포크송의 친근함을 빗댄 말이지만 대신 삶이란 말을 집어넣어도 이질감이 없다. <인사이드 르윈>의 모든 음악은 캐릭터로부터 나온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르윈 데이비스'가 아니고서는 들려줄 수 없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의 노래는 곧 그의 삶이며 그의 삶은 곧 그의 노래가 된다. 만약 음악영화를 상업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면, <인사이드 르윈>은 반드시 후자의 최고작으로 거론될 만하다. 대부분의 알 수 없는 미스터리와 짜증과 피로로 가득한 삶 속에 예상할 수 없는 짧은 미소와 이따금의 행운, '그리니치 빌리지에 사는 르윈 데이비스의 일주일'을 통해 이 영화가 꿰뚫는 인생의 작은 비밀이다. (★ 9/10점.)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2013)>, 조엘 코엔 & 에단 코엔
2014년 1월 29일 (국내) 개봉, 105분, 15세 관람가.
출연: 오스카 아이삭, 캐리 멀리건, 존 굿맨, 가렛 헤드룬드, 아담 드라이버, 저스틴 팀버레이크, F. 머레이 아브라함, 맥스 카셀라, 에단 필립스, 제닌 세랄레스, 제리 그레이슨 등.
수입/배급: (주)블루미지
*북티크 논현점 무비톡클럽 열세 번째 상영작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