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2018), 임순례
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일을 진행하던 당시, VIP 시사회를 통해 임순례 감독님을 잠시 뵐 기회가 있었다. 홍보의 목적으로 으레 진행하곤 하는 ‘추천 영상’을 위해 영화를 보신 소감 말씀을 부탁했는데, 나는 연출자로서의 고민을 헤아리는 그 말씀을 듣고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의 일을 진행할 때는 아예 상영관 하나를 대관하여 단체 관람을 해주시기도 했다. 사적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요, 공식 행사가 아닌 자리에서 뵌 일도 없지만 (어느 식당의 먼 발치에서 감독님을 알아본 적은 있었다!) 영화감독이 아닌 곳에서도 좋은 분일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리틀 포레스트>(2018, 임순례)의 원작을 접하지 못했으므로 이 영화의 각색에 대해서는 평을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나리오가 근래 본 한국 영화 중에서도 정말 좋다는 것이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거의 모든 순간, 스스로 앞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요리로서 이야기하고, 풍경(계절)으로서 캐릭터의 마음을 담아내며, 웃음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대체로 혼자의 시간보다 ‘함께’의 시간으로 느림을 존중하며 섣불리 위로를 건네지 않는, 자연의 방식으로 사람의 일상을 그리는 영화의 존재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막걸리의 누룩은 어른의 맛을 낸다.
여기에 최고의 안주는 알싸한 추위와,
같이 나눠 마실 사람,
그리고 겨울 술은 으스스한 바람과 같이 마셔야 제 맛!”
-혜원-
영화의 시작은 겨울이다. 주인공인 ‘혜원’(김태리)은 서울을 떠나 어릴 때 엄마와 살던 시골 마을로 돌아왔다. 소꿉친구인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과의 관계도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그리고 여름을 지나 가을로 향하면서 ‘혜원’의 집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려 정성껏 돌본 뒤 오래 지나서야 수확을 하게 되는 농사의 섭리와 닮아 있다. 이 영화에 사건이나 갈등이 뭐가 있느냐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한 ‘엄마’(문소리)의 편지를 ‘혜원’은 곶감이 맛있게 열릴 무렵에서야 이해하게 되고, 어른의 맛이었던 막걸리의 맛은 친구들과 기울이는 우정의 맛이 된다. 마술사처럼 뚝딱 내어져 왔던 엄마의 요리들은 ‘혜원’의 손맛을 거쳐 친구들에게, 혹은 자신을 위해 단정한 상차림으로 나온다.
정성스레 공들인 조명과 촬영을 통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리틀 포레스트>의 요리들은 단순히 관객의 식감만 자극하는 소재가 아니라 상술한 것처럼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다. 가령, ‘혜원’이 ‘크렘 브륄레’를 들고 ‘은숙’의 직장에 찾아간다든지, 직접 만든 떡을 친구들과 먹으면서 어릴 적 엄마의 손길을 떠올리는 식의 흐름은 <리틀 포레스트>가 소재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서사에 훌륭하게 녹여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봄에 말이야…
작은 싹들이 언 땅을 뚫고 올라올 때면 뭐랄까,
거룩한 하늘을 향한 대지의 작은 정령들…
그건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재하-
원작을 (일본 영화보다) 분량상 절반가량 압축하면서 불가피하게 계절 간의 호흡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영화의 흐름은 조급하거나 빠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인물과 상황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마치 리얼리티 다큐멘터리를 만들 듯 적정한 거리를 알고 지켜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분명 <리틀 포레스트>의 카메라는 김태리, 류준열이라는 탁월한 배우를 실제보다 더 가까이 클로즈업하고 싶었을 것이라 거의 확신했다) 내레이션을 통해 화자 ‘혜원’은 그 순간에 자신이 느끼고 타인이 공감할 법한 ‘느낌’ 혹은 과거의 기억들을 단편적으로 꺼내놓는다.
“토마토 가지는 방치해두면 정글처럼 무성해진다.
가지를 잘라 땅에 놓고 밟으면
곧바로 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
뜨거운 여름날의 차가운 토마토… 살아있는 느낌이다.”
-혜원-
소설이나 만화라기보다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담긴 일기장처럼 <리틀 포레스트>는 며칠만 머무르려다 아예 사계절을 지내게 된 ‘혜원’의 일상에 부러 여백을 둘 줄 안다. ‘엄마’의 등장도 과거 시점의 플래시백처럼 느껴지기보다 지금, 여기인 것처럼 생생하며 오로지 ‘겨울, 봄, 여름, 가을’ 외에는 시공간에 대한 어떤 설명도 붙이지 않는다. 혼자만의 고민을 털어놓거나, 힘들 때 쉴 곳을 제공하거나, 마음의 평온을 되찾게 해주거나, 혹은 지나간 감정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각자의 작은 숲은 그렇듯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결말에서까지도 관객에게 애써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어떤 인상을 남기려 애쓰지 않는 것을 보면서 진정으로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엔드 크레딧의 맨 마지막 자막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 수 있게 도움 주신 모든 분들과 모든 동식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평생의 여행에서도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콘크리트 자극으로 가득한 한국 영화계에 찾아온, 흙 내음 가득 담긴 에세이다. 이런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리틀 포레스트>는 자연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곳이라고, 수줍게 자신이 적어내려간 노트를 내민다. (★ 8/10점.)
“가을은 동물들과 경쟁해야 해서 더 바쁘다.
열매를 따는 것도, 병뚜껑을 따는 것도,
모든 것엔 적절한 타이밍이 있다.”
-혜원-
<리틀 포레스트>(2018), 임순례
2018년 2월 28일 개봉, 103분, 전체 관람가.
출연: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 박원상 등.
제작: (주)영화사 수박
제공/배급: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2018.02.20 @메가박스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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