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덜리스>(2014), 윌리엄 H. 머시
경찰서에서 방금 나온 남자 '샘'(빌리 크루덥)과, 그를 데리러 온 이웃 '델'(로렌스 피쉬번)의 대화를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전에 그걸 이미 알고 있는 상대에게 '샘은 "You know my story."(그럼 사연은 알겠네.)라고 말하는데, '델'의 답은 "No, I don't know your story, man. All I know is what I read."(알 리가 있나, 기사만 읽었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타인의 속은 자신의 것과 달리 잘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봐야 더 아프게 보인다. '샘'의 마음도 그렇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잃은 슬픔과 함께 그 대상의 몰랐던, 조금도 예상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면을 알게 된 당혹감.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고 2년 후, 잘 나가는 광고 회사의 중역이었던 '샘'은 직장을 떠나 은둔하듯 요트 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요트는 갈 곳을 잃은 채 호수에 정박해 있다. 흔히 떠올릴 만한 꿈과 낭만의 요트가 아니라, '키를 잃고 갈팡질팡하는'(Rudderless) 배에 선장은 없다. 우연한 계기로 (아마도 뮤지션을 꿈꿨던 것으로 보이는) 아들의 노래를 듣게 되면서 <러덜리스>(2014)의 흐름은 중반까지 예상 가능한 '음악 영화'로서의 도식을 따른다. 그러나 영화의 초강수는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웠던 사고의 비밀이 드러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주인공의 피폐해진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러덜리스>는 그가 왜 방향을 잃고 도피해야만 했는지를 직접적이고, 경우에 따라 충격적일 수 있는 방식과 내용으로 꺼내놓는다. '샘'과 그를 공연 무대에 서도록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 '쿠엔틴'(안톤 옐친)은 흡사 부자 관계나 다름없는 양상으로 그려지는데, '쿠엔틴' 역시 '샘'의 2년 전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큰 동요를 겪는다. 여기서 제기되는 화두는 '샘'의 아들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그의 음악, 나아가 예술과 창작자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파장을 남긴다. '샘'이 담담히 마이크를 내려놓는 'Sing Along' 신에 이르러 영화의 키는 멈춰 선다. 그 마이크는 다소 명백히, 관객을 향한 것이다. 당신이라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연출의 방향과 그 모앙새에 비해 영화의 주제는 작품 스스로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만큼 묵직하지만, <러덜리스>는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늘 이야기하고 싶었던 ‘구원’에 관한 영화다"라는 감독의 말로도 충분하다. 종종 숨어 있는 짧은 유머들과 적절히 안배된 영화의 감정적 톤은 이 영화를 대중적이면서도 일정한 완성도를 지닌 드라마로 만든다.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렵겠지만 '질문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결코 얄팍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인물을 선입견이나 섣부른 판단 없이 바라보도록 잘 유도되어 있다는 점에서 '러덜리스' 호는 한 번쯤 승선할 가치가 있다. 누가 오르든 그 키는 당신의 것이다.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들고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흔히 내리기 쉬운 답은 그것에 대해 오히려 간단히 결론지어버리는 것이다. 이면에 담긴 복잡성을 굳이 파헤칠 여력이 남아 있지도 않을 만큼 그 무게는 누군가에게 지대하다. 그런데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사람의 마음 앞에서, 그것들 중 무엇이 더 무겁고 가벼운지를 저울질하기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러덜리스>는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던 한 아버지가, 마침내 그것을 짊어지기로 결심하는 이야기다. 그 결심은 여전히 견고하지 못해서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다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는 사실 자체일 것이다. (★ 7/10점.)
<러덜리스>(Rudderless, 2014), 윌리엄 H. 머시
2015년 7월 9일 (국내) 개봉, 105분, 12세 관람가.
출연: 빌리 크루덥, 안톤 옐친, 펠리시티 호프만, 로렌스 피쉬번, 셀레나 고메즈, 윌리엄 H. 머시, 벤 크웰러 등.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