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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5. 2018

여정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감정이 집약된 걸작

<쓰리 빌보드>(2017), 마틴 맥도나

누군가에게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다. 감독이나 배우 이야길 하는 것도 좋다. 장르도 빠질 수 없다. 누구누구가 나오는 범죄에 관한 드라마인데 좀 웃겨. 로그 라인이 대체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사건과 서사 중심의 영화라면, 다수의 대중들에게 그것은 통한다. 그런데 줄거리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거나, 혹은 무의미하거나, 혹은 그 영화에 대해 별로 말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경우가 있다. <쓰리 빌보드>(2017)는 정확히 그런 부류의 영화다. 내 마음대로 일단 짧게 요약하자면, '딸을 잃은 엄마가 분노를 삭히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영화'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녀'가 마지막 신에서 보여주는 어떤 행동의 단초에 불과하다.


7개월이 지나도록 사건 수사에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한 울분을 알리기로 한 엄마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 통행이 거의 없는 외곽 도로변 옥외 광고판 3개를 연간 임대한다. 'RAPED WHILE DYING', 'AND STILL NO ARRESTS?', 'HOW COME, CHIEF WILLOUGHBY?', 이렇게 세 개의 문구를 쓴다. 내 딸이 강간 당해 살해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건가 윌러비 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근면한 경찰서장으로 동네에 평판이 좋은 인물이다. 자연히 마을 사람들은 이 옥외 광고를 불편히 여기고, 광고를 처음 발견한 경찰관 '딕슨'(샘 록웰)은 특히 이 상황을 못마땅히 여긴다.


<쓰리 빌보드> 스틸컷


이쯤 되면 천인공노할 범죄가 일어났음에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공권력에 대한 분노, 혹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학한 범죄에 대한 공분을 토하는 영화일 것 같아 보인다. '월러비'는 대외적인 평판은 좋지만 정작 사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테고, '딕슨'은 그런 그의 하수인 격일 것이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는 '이런 부류'의 영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관객에게 적어도 세 번 강렬한 훅을 날린다. 이 세 번은 단지 (제목이기도 한) 세 개의 광고판에 각각 적힌 내용이 주는 강렬함 때문이 아니라, 사실상 '밀드레드'의 삶과 그녀라는 캐릭터 자체가 주는 충격이다.


<쓰리 빌보드> 스틸컷


이 영화가 다룰 법한 범죄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것의 당사자 혹은 주변인의 삶은 크게 셋으로 나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삶, 그 일로 인해 무너져 내린 삶,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의 삶. 각각에 1부터 3까지 번호를 매긴다면, <쓰리 빌보드>가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밀드레드 헤이스'의 삶은 2의 중후반부터 3의 시작까지라고 본다. 앞서 언급한 '윌러비'나 '딕슨'은 처음에는 '밀드레드'가 세운 옥외 광고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밀드레드'로 인해 크나큰 신변 혹은 심경의 변화를 맞이한다. 이는 단지 영화 속 캐릭터의 입체성일 뿐 아니라 그들이 일종의 악역이라 지레짐작했을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전개다. 게다가 '딕슨'은 인종차별적 행위를 일삼는 부패한 (혹은 나태한) 경찰관인 것처럼 묘사되기까지 한다.


<쓰리 빌보드>에는 분명, 인종과 소수자 차별에 대한 조소가 담겨 있다. 어쩌면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시스템에 대한 환멸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쓰리 빌보드> 전체를 가로지르는 테마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근본적으로 따져보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이든 무엇이든 책임을 지우거나 비난할 대상을 찾곤 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그에 따른 행동 자체다. 뉴스 매체의 인터뷰를 통해 경찰서장인 '윌러비'에게 사건 미해결의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던 '밀드레드'는 딸을 마지막으로 본 날 자신이 딸에게 했던 심한 말을 떠올린다. 흑인을 차별하는 부패 백인 경찰관처럼 보였던 '딕슨'은 '윌러비'와 '밀드레드' 모두로 인해 이 영화의 모든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큰 신상의 변화를 겪는다. 과연 '밀드레드'의 딸을 해친 진범이 누구인지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밀드레드'의 영화 속 행동 역시 법적 윤리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쓰리 빌보드> 스틸컷
<쓰리 빌보드> 스틸컷


'밀드레드'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는 건 줄곧 당사자들의 상황에 눈치 없이 개입해 아이러니하게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곤 하던, '밀드레드'의 전 남편의 어린 여자친구다. 그녀는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한다"라는, 자신도 그 출처를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남긴다. 중고차를 파는 '술꾼 난쟁이'인 '제임스'(피터 딘클리지) 역시 생각지 못한 대목에서 '밀드레드'에게 도움을 준다. 예고 없이 수시로 개입하는 이 영화의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은 오히려 삶과 세상의 쓰디쓴 현실을 일깨우며 영화에 완벽히 녹아든다.


'밀드레드'는 왜 하필, 사람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버려진 도로 외곽의, 1986년 이후 아무도 쓰지 않는 옥외 광고판에 자극적인 문구를 새겨야만 했을까. 광고판 주변에 무덤덤하게 꽃을 심던 그녀가 자기 집 앞에 앉아 있는 뒷모습에서, 프레임 오른 편에 앉은 그녀의 왼편으로 세 개의 광고판이 먼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가 그 위치를 택한 건 단지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할 경찰서장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공권력의 무능함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던 '쓰리 빌보드'는 누군가에게는 얼핏 이름만 기억할 정도의 잊힌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삶을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충격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떤 범죄든 당사자 뿐 아니라 그 지역사회 전반에 반드시 영향을 준다는 것을 강조한다. (앞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신부에게 '밀드레드'는 어느 갱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이는 단지 방관자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요지의 독설이기만 한 게 아니라, 처음 옥외 광고판을 임대하게 된 그녀의 심정을 대변한다.)


<쓰리 빌보드> 스틸컷


<쓰리 빌보드>의 원제는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다. 미국 미주리 주에는 실제로는 '에빙'이라는 지명의 마을이 없다. (영화의 촬영지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실바'라는 마을이다.) 실존하는 지명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웃사이드'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마을 외곽의 인적이 드문 도로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잊혀 가던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낸 '밀드레드'. 적어도 영화에서의 그녀와 전 남편 '찰리'(존 호키스), 그리고 아들 '로비'(루카스 헤지스)와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삶은 이미 아웃사이더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도 그녀의 분노를 야기한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밀드레드'는 '에빙, 미주리'의 '인사이드'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의 끝에서 그녀의 여정은 그제서야 제대로 시작된다. 그렇다. 이 모든 게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면, 그럼에도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안겨준다면.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나는 <쓰리 빌보드>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지독하게 응축시킨 걸작이라는 확신을 품는다. 이 영화의 음악은 마치 웨스턴 로드무비처럼 내내 귓가에 맴도는데, 이 여정은 단지 결말에서의 그녀의 어떤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선악을 따지고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무의미한 이 영화에서, 누군가에게 (누구에게든) 책임을 묻고 싶었던 '밀드레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딕슨'이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섣부른 희망보다는 그 무언가라도 끝내 놓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내일을 위한 더 실질적인 동력이 될 것이다. 책임 내지는 비난의 대상을 찾는 건 어쩌면 쉽게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종 생기를 잃은 것처럼 무표정하다가도, 어느 순간 웃음을 되찾기도 하는. 끝내 포기하지 않은. 그녀, '밀드레드'의 마지막 대사를 여기쯤 어디에 가져다 놓아본다. "가면서 결정하자고." (★ 10/10점.)



<쓰리 빌보드> 국내 메인 포스터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 마틴 맥도나

2018년 3월 15일 (국내) 개봉, 115분, 15세 관람가.


출연: 프란시스 맥도먼드, 우디 해럴슨, 샘 록웰, 루카스 헤지스, 존 호키스, 피터 딘클리지 등.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쓰리 빌보드> 해외 포스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프란시스 맥도먼드), 남우조연상(샘 록웰) 수상,

남우조연상(우디 해럴슨),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음악상 후보.


*<쓰리 빌보드> 해외 공식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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