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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7. 2018

당신을 사랑하는 일에 무슨 모양이 있겠어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리뷰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태준의 시 '호수' 전문
(문학동네 시인선 101,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는 집 아래에는 오래된 극장이 있다. 오래된 극장에서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철 지난 개봉작들을 틀어놓는다. '상영한다'라는 표현보다 그게 더 적당할 정도로, 손님은 입을 벌린 채 자고 있고 영화는 그저 틀어져 있다. 잠에서 깬 그녀가 듣는 소리는 바깥의 돌아다니는 자동차 소리들도 있지만, 아래층 극장 안 영화의 소리도 있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들을 수 있다. 어느 한 감각이 제한되거나 상실될 경우 이를 보조하는 다른 감각들이 더 발달하고 민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좀 더 잘 보고 잘 들을 수 있다. 그런 그녀에게 영화, 음악, 미술은 고루하거나 사치스러운 예술이거나 소비재에 불과하지 않고, 세상과 만나는 수단이자 자신의 심미적 취향을 충족해주는 양식이다. 그녀의 달력은 주간도 월간도 아닌 일력이다. 뒷면에는 매일을 위한 경구들이 적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엘라이자 에스포지토'. 샐리 호킨스가 연기한 그녀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의 모든 감각을 주도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초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이 가속화되던 시대, 미래를 위한 빠름과 효율을 추구하던 시대다. 말을 하지 못하는 '엘라이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화는 음성 언어보다 느리다. 문자 언어나 음성 언어와 달리 수화는 손의 모양과 동작, 그리고 발화자의 표정으로 의사를 전한다. 제한된 시간 (음성 언어보다 느리기 때문에) 동안 한정적인 표현 방식으로 의미 전달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화는 기능어보다 내용어 위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나는 수화를 알지 못하지만, 내용어 위주라 함은 형식이나 편견 없이 마음의 본 뜻을 전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엘라이자'의 동료인 '젤다'를 연기한 옥타비아 스펜서는 종종 '엘라이자'의 수화를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영화에서 하게 되는데, 그런 캐릭터의 특성상 실제로 수화를 익혔다고 한다. 어순이나 표현 방식 등의 차이로 인해 '엘라이자'의 수화보다 '젤다'의 말, 즉 통역이 앞서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의 속도에도 특히 유의했다고 한다. 기능과 효율만이 가치롭게 인정받던 시대에 그녀의 캐릭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의미를 더 뚜렷하게 만든다.


'젤다'를 제외한 오컴 항공 우주 연구센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라이자'를 그저 말 못하는 청소부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라는 표현에는 '하대한다'라는 의미가 물론 포함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크리처'(괴생명체, 영문 크레딧에는 'Amphibian Man', 즉 '양서류 인간' 정도의 의미로 표기된다. 더그 존스가 수트를 입고 연기했으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크리처의 목소리에 직접 참여했다.)는 '엘라이자'와 마찬가지로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지능이 있다. '엘라이자'에게도 시각과 청각이 있다. 둘은 서로가 지금껏 경험해 온 각자의 삶, 즉 말을 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서로를 오직 보고 듣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는 비약이 아니다. 서로를 처음 만난 순간 '엘라이자'와 '그'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소리에 귀 기울인다. "달걀.", "음악." 그 어떤 수식마저 제거된 단어 자체에서 시작해 이들의 '대화'는 발화되는 언어 대신 서로라는 존재 자체를 더 의식하고 주변 환경과 소품들(달걀, 턴테이블 등)과의 상호 작용으로 말미암아 장벽 없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에서는 말 한 마디 없이도 '엘라이자'와 '그'가 어떻게 교감하는지 세밀하게 묘사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말을 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통은 다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할 수 있다. 비언어적 소통을 제 3자의 시선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오직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다 헤아리기에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인지 영화 안에는 갖가지 다른 영화와 음악들이 '엘라이자'와 '그'의 결여된 음성 언어를 수식하듯 등장한다. 앨리스 페이의 곡 'You'll Never Know'의 가사를 보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염려하는지 모를 거예요', '내 모든 기도에는 언제나 당신의 이름이 있어요',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숨길 수 없어요' 등의 내용이 언급된다. 이 노래를 배경으로 '엘라이자'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신도 있다. 오르페움 극장에서 나오는 영화 <룻 이야기>(1960)에는 "당신이 있는 곳에 나도 머물겠다"라는 내용의 대사도 지나간다. 국내 개봉용으로 '사랑의 모양'이라는 지극히 친절하고 직접적인 부제가 붙기까지 했으니, '엘라이자'와 '그'의 초월적 사랑에 대해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언급할 필요성을 적게 느낀다.


나아가, 나는 '엘라이자'와 '그'가 어떤 사랑을 하는지에 앞서 서로를 감각한다는 것 그 자체에 좀 더 집중할 필요를 느낀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는 고전 영화 속 장면들이 왜 그리도 빈번하게 나올까. 나 역시 그 영화들을 대체로 알지 못한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영화들을 우리가,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방식일 것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속도나 분량에 맞춰 조절이 가능한 책과 달리 영상매체인 영화는 그 특성상 (극장에) 가만히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을 러닝타임 내내 계속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얼핏 능동성이 떨어지는 매체인 것처럼 보인다. 하긴, 요즘에는 알아서 의자를 흔들어주고 물이나 향기를 쏘는 4D 관람도 있으니, 여러모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직접 하는 건 이따금 팝콘이나 음료를 가져다 먹는 것 정도라고 할까. 그러나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는 철저하게 능동적인 일이다. 같은 영화를 같은 시간에 동일한 상영관에서 봐도 영화를 본 사람들 간의 감상이 결코 똑같을 수 없는 건 단지 영상이 주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것을 인지하고 사고했기 때문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그동안 관객은 오로지 보고 들으며 느끼고 생각할 뿐,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극장이라는 공간은 그렇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에티켓 이야길 늘어놓고 싶진 않지만 극장은 보고 듣는 공간이지 수다를 떨거나 감상을 실시간으로 나누는 공간이 아니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말'은 보고 듣는 행위를 침해한다. 영화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보기만 했고, 듣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보는 것들의 색깔을 알기 시작했다. (무성-유성-칼라) 나는 지금 '엘라이자'와 '그'가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서로를 받아들이고 느끼며 나아가 그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서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엘라이자'는 이웃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에게 "그는 마치 내 흠결을 모르는 것처럼 날 바라봤어요"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가 크리처가 아니라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같은 '그냥 사람'이었다면 '엘라이자'를 대면하고는 이렇게 물었겠지. 말씀을 못하시나 봐요.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물론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렇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약이 있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자일스'와 '젤다'와 '호프스테틀러'(마이클 스털버그) 정도는 사람을 외면으로만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 인물의 성격은 다르다. '자일스'는 프랜차이즈 파이 가게 매니저의 기계적 친절도 자신을 향한 관심으로 받아들일 만큼 낭만적(?)인 사람이고, '젤다'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삶과 일상에 일정 부분 억눌려 있으며, '호프스테틀러'는 생명을 존중하고 경외하지만 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에 영향을 받는 인물로 보인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단지 고전에의 애정과 향수만이 담긴 영화가 아니다. 딱 하나의 신을 제외하면 말을 하지 못하는 인물인 '엘라이자'와, 지극히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크리처'라는 캐릭터는 각자 눈을 위, 아래와 좌, 우로 깜빡이면서 시종 관객에게 말을 건다. 말을 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모두가 녹색의 미래를 예찬하며 앞만 보고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때. 상하와 양옆도 좀 돌아보라고. 기능과 효율을 따지기 앞서 대상 그 자체의 속성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고. 그리하여 사랑은 눈앞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가 눈앞의 스크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며 느낄 수 있는 그 어디에나 물처럼 한없이 존재한다고. 그 마음이 모여 우리를 온전히 적시는 바다가 된다고. 영화의 제목은 아름답지만 사실상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마음의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생겨나는 사랑처럼, 처음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접했을 때의 그 순수함처럼, 구체적인 사랑은 그리하여 만들어진다. 단순한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판타지 영화이며, 익숙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적인 사랑 이야기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틸컷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리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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