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2018), 스티븐 스필버그
나는 게임을 그저 공허하고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사탕발림, 정도로 치부하는 이에게 한껏 코웃음 치면서 오히려 그를 대중문화의 가치를 모르는 무지한 자라고 얼마든지 반의를 표할 용의가 있다. 다만 그러는 대신에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을 보여주면 좋겠다. 이 작품에 나오는 방대한 1980년대 대중문화(게임, 음악, 영화, 드라마를 모두 포함한다.)를 일일이 다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게임에 관한 어떤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어니스트 클라인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레디 플레이어 원>은 아마도 오락을 그저 현실도피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기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는 작품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그게 문화가 되고, 곧 삶이 되는 거라고. 게다가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작품의 연출을 위한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다, 명백히. <죠스>(1975)를 시작으로 유수의 블록버스터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시대와 세상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동시에 기술의 선봉에 선 작가이자 장인. 어릴 때부터 영화를 사랑했고 나아가 그 산업의 일부가 되고 마침내 역사이자 상징이 된 사람이니까.
작 중 가상현실 '오아시스'를 만든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는 죽기 전 유언을 통해 자신이 숨긴 이스터에그를 찾는 이에게 재산과 '오아시스' 운영권을 주겠다고 공표한다. 미디어에 있어 최초의 '이스터에그'는 아타리 사의 한 게임 개발자가 자신의 게임을 사랑해서 게임 속 비밀 공간에 본인의 이름을 몰래 심어둔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아타리는 게임 내에 개발자의 크레딧을 원칙적으로 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이스터에그를 찾으려면 게임을 승부나 성취의 수단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그 게임에 대한 애정 자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비단 게임만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을 망라한 대중문화 전반에 이는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E.T.>(1982)와 같은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며 스토리텔러를 꿈꾼 어니스트 클라인은 마침내 자신의 원작을 바로 그 스필버그가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를 목도하게 되었고, 그 원작의 각색과 기획에 직접 참여했다. "내가 독자로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다"라는 이 사람보다, 더 '성공한 덕후'의 예가 나는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아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방식이나 까닭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이는 결코 환상이나 낭만에만 젖어 있는 발상이 아니다. 세상을 바꾼 이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관철시키고 마침내 실현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 지도는 없으니까." 다만 무엇이든 순수하게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 그것만이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그리고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깊은 애정을 바치는 이유다. 이 세상의 모든 문화와 그 창작자들을 위하여.
영문 포스터의 문구를 한 번 더 생각한다. A Better Reality Awaits. 그렇다. 이 영화는 단지 '가상현실'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콘텐츠를 향한 순수한 애정과 경의가 조금 더 나은 현실을 만들어주는 데 기여할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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