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2017), 마틴 맥도나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씩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을 사람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혹은 그것이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기도 한다. 꺼내지지 못하고 입안으로 다시 삼켜지는 말들까지도 고려한다면 언어는 가히 어디에나 있다고 해야겠다. 명상에 잠긴 상태가 아닌 이상 사소한 생각조차 추상적인 언어의 형태로 떠올려지게 되고, 컴퓨터가 아닌 이상 그들 중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건 자연스럽다. 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데 가끔씩, 예상하지 못한 때와 장소에서 내가 했던 말이 어떤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일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똑같은 형태의 언어로 박제돼 돌아오고, 누군가에겐 더 날카로워진 비수가 되어 꽂히며, 또 누군가에겐, 이제는 다시없을 거라고 여겼던 희망의 손길을 건네기도 한다.
<쓰리 빌보드>(2017)는 바로 그런, 돌고 돌아 언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말들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 영화 속 인물들의 말은 그저 한 번 내뱉어지고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두 가지 의미로 그렇다. 조금도 불필요하거나 과잉된 영화 언어 없이 철저하고 치밀한 각본이라는 의미가 하나이며, 영화의 중요한 대사(내레이션 포함)는 모두 한 번 이상 다시 등장하거나 변주된다. 앞의 의미는 여러 차례 영화와 시나리오를 곱씹고 또 곱씹은 내 결론이며, 뒤의 의미는 이 영화의 각본이 왜 그토록 뛰어난지에 대한 몇 가지 주석이 될 것이다.
*이하 <쓰리 빌보드>에 대한 상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에 대해 얘기하는 김에 우선 결말부터 살펴봐야 하겠다. "가면서 결정하자고" 했던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딕슨'(샘 록웰)의 여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수한 가상의 경우의 수들이 가능하므로 굳이 여기서는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가면서 결정하자"고 했기 때문에 아이다호에 가서도 그 남자를 죽이지 않았을 수 있다. 자신의 기념품 숍에 찾아왔던 바로 그 사람임을 적어도 결말 시점까지는 몰랐겠지만 '밀드레드'는 아이다호에 가서도 단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돌아올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에게 겁을 줬던 바로 그 남자임을 알아차리고는 직접 혼쭐을 내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기 직전, '딕슨'은 트렁크에 총을 싣는 반면 '밀드레드'는 그냥 음료와 간식 따위를 싣고 있었다.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결말을 열어두고 있는지 미루어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둘째는, 일단 미주리 주에서 아이다호 주까지 2,500km가 넘고 차로 꼬박 24시간도 넘게 달려야 하는 거리다. 셋째는, 드라이브 좀 하다가 아이다호까지 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시나리오 작가라면 충분히 <쓰리 빌보드, 그 두 번째 이야기>를 만들고도 모자라 프리퀄까지 만들 수 있을 만한 개방성이다. 그러나 나는 며칠이 걸리든 몇 킬로미터를 달리든 간에 '밀드레드'와 '딕슨'은 결국 번호판을 추적해 아이다호에 사는 그 남자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쓰리 빌보드>의 대사들이 어떻게 반복되고 변용되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그 추론에 대한 부연을 시도하려고 한다.
가장 먼저 짚어볼 것은 영화 <쓰리 빌보드>의 모든 일이 시작되기 7개월 전, '밀드레드'와 딸의 대화다. 영화상 비교적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대화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같은 말의 간격이 영화에서 가장 짧다. 그리고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어느 한 사람을 심적으로 무겁게 짓누른다. 딸 '안젤라'에게 차를 빌려주지 않고 걸어가게 하려다가 '밀드레드'는 오히려 (앞서 시도했던 농담에도 불구) 딸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하고, 그런 딸은 자리를 뜨며 "걸어가다가 강간이나 당해버릴 거야!"라는 무서운 말을 뱉는다. '밀드레드' 역시 "그래, 걸어가다가 강간이나 당해버려!"라고 응수한다. 이 날선 대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영화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현재의, 아마도 딸이 썼던 방으로 보이는 곳의 침대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밀드레드'의 뒷모습으로 점프한다. 딸의 생전에 들은 마지막 말은 7개월이 지나서도 엄마의 등 뒤로 내리꽂히며 그녀를 무너뜨릴 기세다.
'밀드레드'가 딸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린 건 광고판이 "하루에 기껏 2초나 잊을까 말까 한" '안젤라'의 죽음을 상기시킨다며 불만을 토로한 아들 '로비'(루카스 헤지스) 때문이다.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들어간 '로비'의 뒤로 카메라는 빠르게 그 닫히는 문을 바라보는 '밀드레드'를 향한다. 그녀가 여는 딸의 방 문에는 'DANGER'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아마도 딸의 방에 들어가면 슬픈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라 그녀는 공사현장 같은 곳에서나 볼 법한 표지판을 어디선가 구해다 문에다 붙여야만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날 딸이 죽지 않았다면 '밀드레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가 딸과 그런 대화를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우리 집에 앞으로 미친년은 없어"라는 엄마의 말에 "엄마 이제 집 나가려고?"라고 받아치는 '로비'의 대화, 그리고 전 남편 '찰리'(존 호키스)와 말다툼을 벌이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는 '밀드레드'와 아빠와 같이 엎어진 식탁을 다시 일으키는 '로비'의 행동 등을 통해 우리는 이미 이 가족이 흔히 떠올릴 법한 정상적인 범주의 화목한 가족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필 그날 딸이 끔찍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로비'는 경찰 보고서를 일부러 읽지 않고도 누이의 죽음을 매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고 '밀드레드'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것에 더욱 분노하는 동시에 자신이 '안젤라'에게 그다지 좋은 엄마이지 못했다는 회한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광고판이 붙은 지 며칠 후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밀드레드'의 집을 찾는다. 목격자도 없고 DNA가 일치하는 범죄자도 없다며 항변하는 '윌러비'에게 '밀드레드'는 "나라면 8세 이상 모든 남성을 검사해서 일치하는 DNA가 있다면 그 사람을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이 장면은 사적 복수의 허용 범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대화의 끝에서 '밀드레드'는 "당신이 계집애처럼 징징대는 동안 다른 여자가 죽어갈지도 모르는데 우선순위가 따로 있다면 나도 할 말이 없네요"라고 말하며 그 말을 들은 '윌러비'는 말없이 돌아간다. 직전 장면에서 '윌러비'는 아내에게 "전쟁을 치르게 생겼다"고 한다. 물론 중반에서 짐작했다시피 이 영화는 피해자의 엄마와 가해자를 찾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의 대결 구도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니 '윌러비'가 표현한 이 '전쟁'은 다른 양상으로 치러지게 된다.
다시 '밀드레드'의 말을 상기해보면, 거기에는 자신의 딸 '안젤라'만이 아니라 이 순간 어딘가에서 또 다른 여성을 노린 범죄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점에서 '밀드레드'는 타인(벌레 포함)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나 연민으로서의 선한 성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찾도록 경찰의 주의를 끄는 것 (광고판을 세움으로써)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가 8세 이상의 모든 남성들의 피를 검사하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성범죄자를 전부 잡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딸을 죽인 바로 그 범인을 찾아내라는 의미에 국한된다. 영화의 이 시점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간 후 '밀드레드'는 결말에 이르러 자신이 했던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 아니,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딕슨'과 함께 말이다. '딕슨'이 구타를 당해가며 DNA를 손수 채취한 그 남자는 '안젤라'를 죽인 바로 그 남자는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만, '딕슨'은 적어도 그가 해외 어딘가에서 '안젤라'가 당한 것과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아이다호로 드라이브 다녀와야겠다"라고 말하는 '밀드레드'의 뜻은 곧 그 남자가 잠재적 재범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두고 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밀드레드'는 경찰이든 누구든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영화 속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본인이 직접 행동에 나서게 된 캐릭터다. 경찰에게 징징대지 말고 빨리 범인을 잡으라고 채근하던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타인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로 실천하게 된다.
'윌러비'가 자살한 후 '딕슨'은 "백인도 팰 수 있다"며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스)를 찾아가 폭행하고는 창문을 깨고 아래층으로 내던진다. 이후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윌러비'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느라 불을 피하지 못한 '딕슨'은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오고 그 병실은 하필 '웰비'와 같은 방이다. 아직 붕대를 감은 환자가 '딕슨'인 걸 모르는 '웰비'는 "괜찮아질 거예요"라며 위로를 건넨다. 그를 알아본 '딕슨'이 울면서 사과하자 '웰비'는 눈물 때문에 상처가 덧날 것을 걱정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이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웰비'가 빨대를 꽂아 '딕슨'에게 건네는 유리잔의 오렌지 주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웰비'에게 들은 말을 '딕슨'은 집 화장실에서 문 밖의 엄마에게 그대로 한다. "괜찮을 거예요, 엄마." 앞에서는 화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채였지만, 여기서는 '그 남자'에게 맞고 피를 흘리며 집 안으로 들어온 채다. 병실에서 화장실로 장소가 바뀌었고 '딕슨'은 '웰비'로 인해 엄마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보인다. (초반부 광고판 아래에서의 '윌러비'와 '딕슨'의 대화 중 '윌러비'가 한 말처럼) 턱을 날려버리겠다는 둥 자신을 놀리는 엄마에게 막말을 했던 '딕슨'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듯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한다.
초반까지 '밀드레드'를 악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엄마, '윌러비'와 '딕슨'을 시민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고 범죄 해결에 관심이 없는 무능하거나 부패한 경찰 정도로 지레짐작했을 관객에게 이 결정적인 장면은 그 섣부른 가치판단을 (나아가 증오를) 거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캐릭터 변화를 백인 남성을 옹호하는 귀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밀드레드'를 나쁜 여성으로 만드는 흐름도 아니다. 영화의 중심 캐릭터인 '밀드레드', '윌러비', '딕슨'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은 결국 작은 것이라도 흠결이 없을 수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역설하는 대목인 것이다. 무엇보다, <쓰리 빌보드>는 여성, 흑인, 성소수자 등에 대해 편향적이거나 억압적인 시선을 가진 영화도 아니다.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오는, 얼굴에 붕대를 감은 '딕슨'의 세 차례의 시점 쇼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 병상에 누운 채로 실려가며 천장을 바라보는 '딕슨'. 비록 마을 사람들 누구에게도 공직자로서 (자신이 존경하는 '윌러비'와 달리) 존경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그동안 구타했을, 그리하여 병원에 실려와야만 했을 누군가의 시점이 되어 있는 것이다. 둘,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자신과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이 '웰비'임을 알아차린 '딕슨'. 그는 눈물을 흘리고 사과한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여기서는 그저 치료받아야 할 두 명의 환자일 뿐이다. 셋, '웰비'가 자신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을까 두려운 상태로 '웰비'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딕슨'. '웰비'가 침대 옆 테이블에 주스 잔을 내려놓는 순간 음악이 바뀐다. '밀드레드'가 여정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영화에서 '딕슨'의 쇼트가 들어간 이유는 물론 그가 신변과 심경의 변화를 겪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개과천선할 수 없는 밑바닥의 인물이 아니라 '윌러비'가 언급한 것처럼 사실은 그리 나쁜 사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벽하진 않지만 어쩌면 변할 수도 있다는, 영화의 열리고 선한 태도가 드러난다.
영화의 결말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이 찾아가는 아이다호에 산다는 그 남자(크레딧에도 'Crop-Haired Guy'라고만 나온다. 이름이 없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특정한 성격을 지닌 정형화된 캐릭터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알다시피 '밀드레드'의 기념품 숍에 한 번 찾아왔었다. 7달러짜리 토끼 인형을 던지고 '밀드레드'에게 위협적으로 접근한 그 남자는 스무 고개 하듯 "'윌러비'의 친구일지도", "죽은 딸의 친구일지도", "죽은 딸을 강간한 놈일지도"라며 (그때마다 '밀드레드'는 "진짜야?"라고 반문한다.) 긴장을 조성한다. 마침 '앤'(애비 코니쉬)이 가게에 찾아오면서 상황은 수습되고, 7달러를 받아낼 거라는 '밀드레드'에게 그는 "다음에 다시 마주치면 해봐"라고 한 뒤 가게를 나선다. 다음에 마주치면. 아마도 그다음은 '밀드레드'와 '딕슨'이 결국 아이다호 주에 도착하고 나서이지 않을까. 지난날의 어떤 범죄를 술집에서 무용담처럼 늘어놓다 곁에 있던 경찰관에게 탄로 나는 일처럼. 사소하게 생각했던 말은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밀드레드'나 '딕슨'처럼 변화하고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의 무게를 체감할 것이고, '그 남자'처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그 무게를 결코 깨닫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분량상 전체를 실을 수는 없지만 <쓰리 빌보드>의 거의 모든 대사와 상징들은 허투루 소모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Old Cunt'와 'Crazy Lady'로 원문은 다르지만 국내용 번역을 통해 "미친 할망구"로 통용된 '로비'와 '찰리'의 대사처럼 코미디로 기능하기도 하고, '로비'의 일관되게 반어적인 "고마워 죽겠네"처럼 캐릭터를 확실히 구축하기도 한다. 광고판으로 인해 '윌러비'에게 제기된 질문은 결과적으로 '딕슨'에게 돌아온다. 광고판처럼 영화의 많은 것들은 세 종류로 등장하거나 세 번 반복된다. 불이 난 광고판을 발견한 '밀드레드'와 '로비'의 "말도 안 돼" 같은 대사까지도. 이 각본은 아주 능란한 방식으로 쓰여 있으면서도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시점과 장면의 배치, 캐릭터의 등장 등 많은 부분 서사의 결을 충실히 따른다. 세 인물의 팽팽한 균형감과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밀드레드'의 울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내내 따라가면서도, '밀드레드'가 영화의 주인공임을 잊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메시지가 먼저 있고 각본과 캐릭터가 그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물을 진정 이해하고자 노력한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강력한 캐릭터와 그들이 체스 말이 되어 이끌어가는 서사가 있다. 그것을 열고 닫는 액자처럼 드링크워터 로드로 차를 몰고 들어오는 '밀드레드'와 다시 그 길을 따라 아이다호를 향해 차를 몰고 나가는 '밀드레드'가 있다.
혹시라도 이 영화를 '피해자를 억압하는 영화'라거나 '백인 남성의 자기변명'이라거나 '혐오스러운 대사가 난무하기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 관객이 있다면, 영화 속 대사의 표면적인 의미 자체보다 그 속뜻을 한 번 더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첫째,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과, 그 캐릭터의 심적 변화를 그리는 방식과, 그 캐릭터를 직조하는 영화의 태도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내용 자체보다 언제나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다뤄지느냐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음악도 반복된다. 영화의 맨 처음 나오는 곡은 실은 '딕슨'이 '윌러비'가 남긴 편지를 읽는 신이 포함된 '밀드레드'의 경찰서 방화 시퀀스에 나오는 'Last Rose of Summer'다. 토마스 무어의 시에 노래를 입힌 이 곡의 가사는 (영화에 삽입된 곡은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불렀다.) 피어 있는 장미 곁의 져버린 장미로 대변되는, 떠나간 동료들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유한하고 덧없는 삶에 대한 처연함까지 담겨 있다. 광고판 임대료 이야기를 하던 중 '윌러비'의 시한부를 언급하는 '웰비'에게 '밀드레드'는 "사람은 어차피 다 죽어"라고 말한다. 방화 시퀀스에서 곡 전체가 나오게 되는 'Last Rose of Summer'는 영화 도입에서는 '밀드레드'가 오래된 하기스 기저귀 광고를 발견하고 차를 멈춰 서는 대목에서 중도에 페이드아웃 된다. 두 번째 곡('Mildred Goes To War') 역시 중후반에 걸쳐 몇 차례 비슷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 변주된다. ('I've Been Arrested', 'Billboards On Fire' 등) 말하자면 <쓰리 빌보드>의 음악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대사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가 지닌 특성의 차이에 관해서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과 <목소리의 형태>(2016)에 관해 쓰면서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쓰리 빌보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윌러비'의 세 개의 편지는 말로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문자 언어로 '앤', '밀드레드', '딕슨'에게 전달된다. 각각의 수신인을 향한 진의가 담긴 세 편지는 '앤'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변호하지 않으면서도 미안함과 사랑을 전하고, '밀드레드'에게는 자신이 광고판 때문에 자살하는 게 아니라는 것과 범인이 언젠가 꼭 잡히길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딕슨'에게는 ('페넬로페'가 '찰리'를 거쳐 '밀드레드'에게 전하게 되는 말과 유사하게) 너무 많은 화를 다스리고 침착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 것을 당부한다. 내레이션 역시 영화 언어에 포함되지만, 이 편지의 내용들은 직접적인 대사로서 반복되는 게 아니라 영화 속 다른 상징이나 다른 인물들의 행동(혹은 그 행동을 촉발하는 요인)으로서 실현된다. (예: 범인이 잡히지 않더라도 몇 년 후에 그가 술집 등에서 자랑처럼 떠벌리다가 잡히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가 후반부 '딕슨'과 '그 남자'의 술집에서의 장면으로 등장한다.) '윌러비'가 편지에서 체스 언급을 한 것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는 '딕슨'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대해 비교적 세밀히 파악하고 관찰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췌장암을 마을 사람들이 대충 다 알고 있다는 걸 몰랐던 것만 빼면!) 비교적 빠르고 가볍게 전달될 수 있는 말에 비하여, 정제된 문자 언어는 상대가 그 뜻을 조금 더 긴밀하게 헤아리게 만든다.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처럼 내용이 차단되거나 곡해될 여지도 적다. '윌러비'의 두 번째 편지의 말미에는 진심으로 범인이 잡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한 번 더 등장한다. 길게 여겨질 수 있는 내레이션의 양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는 '윌러비' 자신의 변호가 아닌 '밀드레드'를 향한 첨언임을 그 마지막 문장을 통해 상기하게 된다. '윌러비'는 어쩌면 광고판의 존재만으로는 '안젤라 헤이스'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 광고판으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밀드레드'와 '안젤라'와 같은, 공권력의 책임감과 그로 인한 경각심이 제대로 닿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한 변화.
밀드레드 헤이스. 이보다 매력적이고 강렬한 캐릭터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단지 시상식에서의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벅찬 수상 소감 때문만이 아니다. '밀드레드 헤이스'는 자신이 뜻한 바를 적극 행동으로 옮기며, 두려움을 느낄 줄도 알지만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 조금도 주눅 들지 않으며, 완전 무결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하며, 타인에게 진정으로 우러나온 인간애를 베풀 줄도 안다. 관객 모두가 전원 좋아할 수는 없는 영화이지만 (주지하다시피 그런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쓰리 빌보드>가 자신을, 자식을 잃은 부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흔한 복수의 서사이거나 익숙한 사회비판적 드라마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을 관객에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훅을 날리는 영화라는 점만큼은 과연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쓰리 빌보드>는 "이제는 지겹다. 그만하자"라고 타인의 아픔을 억누르거나 폄하하는 이들을 향한 '가운데 손가락'이라 할 만하다. 어쩐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차를 멈추고 핸들에서 손을 뗀 '밀드레드'가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손가락이 가운데 손가락이었다는 걸 알아챈,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자 이 영화의 끝에서 그녀의 삶을 무한히 응원하고 싶어졌다.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그렇게 영화라는 것은 내가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에 결코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어렴풋하게 그녀와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만드니까. 그리고 그것이 영화 밖의 이곳 어딘가에서 나의 가볍지 않은 언어가 되게 하니까. 내게 <쓰리 빌보드>는 그 엄숙한 말의 무게에 관한 여정을 다루는, 유머를 잃지 않되 장중한 드라마다.
*<쓰리 빌보드> 리뷰 1 '여정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감정이 집약된 걸작': (링크)
*<쓰리 빌보드> 리뷰 2 '그녀는 왜, 아무도 찾지 않는 세 개의 빌보드를 보았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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