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Mar 12. 2018

서로의 다른 언어를 끝내 이해하고자 하는, 오랜 노력

<목소리의 형태>(2016), 야마다 나오코

'말을 한다'는 건 일방적이다. 상대가 어떻게 듣든지, 내 할 말을 하고 나면 듣는 것과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건 청자의 몫이 된다. 그러나 언어가 음성이 아니라 문자이거나 신체와 관련되는 순간, 그것은 상호 간의 언어가 된다. 글은 직접 읽어야 하고, 수화는 그 뜻에 상응하는 기호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쇼코'는 들을 수 없다. 초등학교에 전학 온 '쇼코'는 자기소개를 노트에 적어온 인사로 대신한다. "저와 대화하고 싶다면 이 노트를 이용해주세요." 그런 '쇼코'를 '쇼야'는 처음에는 장난삼아, 그리고 나중에는 관성적으로 괴롭힌다. 몇 차례의 일이 있은 후 '쇼코'는 전학을 가고, '쇼야'는 따돌림과 괴롭힘의 가해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얼핏 엿볼 수 있는 (청각 장애, 집단 따돌림 등) 소재와 달리 <목소리의 형태>(2016)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쇼야'가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목소리의 형태>는 관계들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그 누군가가 상처를 입는 모습을 소홀히 다루거나 애써 갈등을 봉합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쇼코'가 아니라 '쇼야'가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점도 단지 작가적 취사선택에 불과하다.


<목소리의 형태> 스틸컷


모두가 가해자이거나 혹은 모두가 피해자라는 식의 섣부른 결론도 짓지 않는 대신에 <목소리의 형태>는 '쇼코'와 '쇼야' 두 소녀와 소년의 마음을 가만히 관찰하며 청소년기의 복잡하며 불완전한, 그리고 연약한 모습들을 언어라는 매개로 다룬다. 우리 모두는 유리처럼 깨지기 쉽기 때문에,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게다가 관계란 버튼을 누르듯 단순히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복잡성을 자신의 것에 비해 너무나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다 함은, 그저 타인의 입으로부터 어떤 소리가 났음을 자각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 소리가 나에게 다가왔음을 뜻한다. 영화에서 여러 차례 제시되는 이미지들처럼 이것은 물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파동의 모습과 그 흐름과 닮아 있다. 타인의 말이 소리를 거쳐서 나에게 특정한 울림으로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쇼코'는 '쇼야'를 비롯한 타인의 목소리를 거의 알 수 없고, 그 '타인들' 대부분은 수화를 모른다. 학교에서 수화를 배울 기회가 생겼을 때도 한 친구 외에는 아무도 그것에 나서지 않는다. '쇼코'가 남기고 떠난 필담 노트를 손에 든 '쇼야'는 그러나 수화를 배운다. 서툴고 부정확하지만, '쇼코'에게 미안함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청각 장애인을 위해 수화를 배워서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바를 표현하기만 하면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어떤 성격을 지녔고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그 지평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목소리의 형태> 스틸컷
<목소리의 형태> 스틸컷


작품을 통틀어 서로의 언어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쇼야'와 '쇼코' 둘 사이에서만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주변인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타인들과의 수많은 소통의 실패 끝에 습관처럼 억지로 꾸며진 웃음과 기계적 "미안해"를 연발하며 자라온 '쇼코'는 자신에게 사과하고 싶어 하며 고독과 죄책감을 깊이 떠안고 있는 '쇼야'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단순한 자기만족과 합리화가 아닌, 어떤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아가 '쇼야'가 오히려 자신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쇼야' 역시 '쇼코'에 대해 그렇게 느낀다. '쇼코'가 자신 때문에 불행해졌고 자신이 몹쓸 잘못을 돌이킬 수 없이 저질렀다고 믿는 '쇼야'는 자신이 망가뜨린 보청기 값을 (엄마에게) 갚고 신변과 주변을 정리하려 한다. 단지 '쇼'라는 애칭만 같은 게 아니라, 실은 두 사람은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행동과 행적을 통해 마치 거울처럼 닮은 캐릭터로 드러난다.


그런 '쇼야'와 '쇼코'의 캐릭터의 특징은 <목소리의 형태>가 섣부른 심판이나 용서에 관한 작품이 아님을 더욱 명확히 한다. 수화로 사과의 말을 전하면서 필담 노트를 돌려준다고 해서, 작품 내의 갈등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공존한다. 살고 있다. 자신 때문에, 혹은 자신이 살아있음으로 인해 상대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던 둘은, 스스로에 대한 깊은 책망과 혐오를 딛고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쇼코'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타인에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쇼야'는 수화를 점차 뚜렷하고 풍부하게 구사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다른 언어가 마침내 '마음을 전한다'는 공통점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만화의 원작자 오이마 요시토키가 강조한 것처럼 <목소리의 형태>는 부재하거나 단절됐던 소통의 회복과,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극복을 중점으로 다룬다. 어린 시절 큰 상처로 남은 그 사건의 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후의 삶은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껴안을 때 비로소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 타인의 아픔에 관하여, 단지 보이고 들리는 게 전부가 아닌 마음의 언어에 관하여, <목소리의 형태>는 각 캐릭터의 내면과 적절히 호응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배치해 그 파편들을 끝내 조각으로 맞춰나간다. 열려 있는 결말에서의 시점은 여전히 성인이 되기 전이다. 서로가 무릎을 꿇은, 가장 중요한 어떤 장면에서 '쇼야'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살아가는 걸 도와줘." 이는 용서나 구원이 아니다. "나도 살 테니, 너도 살아줘."에 다름 아니다. 성인이 된 후의 이들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둘은 알았을 것이다. 타인에게 진정 마음을 열지 못하면,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도 고립된다는 것을. (★ 8/10점.)




<목소리의 형태> 국내 메인 포스터

<목소리의 형태>(The Shape of Voice, 2016), 야마다 나오코

2017년 5월 9일 (국내) 개봉, 129분, 전체 관람가.


(목소리) 출연: 이리노 미유, 하야미 시오리, 유우키 아오이, 오노 켄쇼, 카네코 유우키, 이시카와 유이, 마츠오카 마유 등.


수입: (주)엔케이컨텐츠, (주)콘텐츠게이트

배급: (주)디스테이션


<목소리의 형태> 스틸컷

*<목소리의 형태> 국내 메인 예고편: (링크)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